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프랑스팀의 굴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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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성적과 무관하게 프랑스팀은 남아공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데는 성공했다. ‘콩가루 집안’의 진수를 보여줬으니 말이다. 선수는 감독에게 대들고, 감독은 대든 선수를 중도하차시켜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반발해 선수들은 훈련을 거부했다. 감독은 경기에서 졌다고 상대팀 감독의 악수 제의를 거부했다. 프랑스팀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은 남아공 월드컵 최대의 웃음거리가 됐다. 예선을 통과했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 될 뻔했다.

스타 플레이어를 모아 놨다고 그 팀이 최고가 되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 대표팀의 면면은 화려하다. 몸값이 수백억원을 넘는 선수가 여럿이다. 주장인 파트리스 에브라를 포함해 7명의 선수가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고 있다. 그럼에도 프랑스팀은 1무2패의 초라한 성적으로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세 경기 통틀어 4골을 먹고, 1득점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일러스트=강일구]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프랑스팀이 거둔 승리는 에메 자케란 감독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철저하게 팀워크 위주로 선수를 기용했다. 단독 드리블로 골을 터뜨리는 선수보다 결정적인 어시스트로 골을 만들어내는 선수를 중용했다.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에릭 캉토나가 대표팀 명단에서 빠지자 프랑스 언론은 발칵 뒤집혔다. 하지만 그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언론으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하면서도 자신의 원칙을 밀고 나갔다.

그의 용병술은 지네딘 지단이란 스타를 탄생시켰다. 지단은 자케의 축구 철학에 가장 충실한 선수였다. 화려함 대신 헌신을 택했다. 자케는 지단을 중심으로 11명 전원이 공격과 수비에 나서는 전방위 축구로, 몇 명의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한 브라질을 3대 0으로 꺾고 우승했다.

그해 7월의 파리는 흥분과 열광, 환희의 도가니였다. 프랑스가 처음으로 월드컵의 주인이 되던 날, 파리에서는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샹젤리제는 밤새 “알레 라 프랑스(가자, 프랑스)”를 외치는 사람들의 함성과 자동차들의 경적 소리로 떠나갈듯했다. 계층과 나이, 남녀와 인종, 정치와 종교적 신념의 차이를 떠나 프랑스는 하나가 됐다. 백인과 흑인, 아랍인으로 이루어진 ‘유나이티드 컬러스 오브 프랑스(United Colors of France)’팀이 이루어낸 ‘다양성의 힘’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다인종 팀인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데 뭐가 달라진 것일까.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조차 따라 부르지 못하는 아랍권이나 아프리카 출신 선수들의 애국심과 정체성을 문제 삼는 목소리부터 프랑스적 가치의 실종에서 원인을 찾는 목소리까지 온갖 얘기가 다 나오고 있다. 르몽드지는 “프랑스 월드컵팀은 프랑스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며 “이기주의, 배금주의, 분파주의 등 프랑스 사회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고 지적했다.

다양성은 힘의 원천이지 그 자체가 힘은 아니다. 다양성은 톨레랑스(관용)라는 접착제와 만날 때 힘이 될 수 있다. 시멘트가 물을 만나야 단단하게 뭉쳐지듯 다양한 개성과 의견은 서로를 용인하고, 인정하는 톨레랑스와 합쳐질 때 힘이 될 수 있다. 톨레랑스 없는 다양성은 모래알이고, 콩가루일 뿐이다. 프랑스팀의 자멸에서 톨레랑스가 사라져가고 있는 프랑스 사회의 단면을 보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2005년 6월, 파리 근교 슬럼 지역에서 시작된 이민자 출신 청년들의 폭동으로 여름 내내 프랑스 사회는 열병을 앓았다. 그들은 차별 철폐를 요구하며 프랑스 공권력에 폭력으로 맞섰다. 곳곳에서 자동차가 불타고, 상점 유리창이 박살 났다.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는 그들을 ‘불한당’으로 규정하고,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듯이 싹 쓸어버리겠다”며 ‘톨레랑스 제로’를 선언했다. 그 덕에 폭동을 잠재울 순 있었지만 후유증은 깊고 크다. 사회적 양극화 속에 계층 간 갈등과 대립이 심화되면서 사회가 갈수록 각박해져 가고 있다. 남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미덕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한 톨레랑스도 마찬가지다. 사르코지를 아첨꾼에 둘러싸인 권력의 화신으로 묘사한 코미디언들이 방송국에서 일자리를 잃고, 대통령에게 험담을 퍼부은 시민은 법의 심판을 받았다. 사르코지를 비판한 언론에 대한 소송도 크게 늘고 있다. 법과 질서의 확립이란 명분 아래 프랑스적 가치의 상징이었던 톨레랑스는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하지만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볼테르의 말에 프랑스적 가치는 함축돼 있다. 그나마 프랑스를 지탱해 온 힘의 원천이기도 하다. 귀에 거슬리더라도 소수의 목소리를 용인하고, 억압하지 않을 때 다양성은 힘이 될 수 있다. 마녀사냥에 대한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때 다양성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지도자다. 지도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양성은 약이 될 수도 있고, 독이 될 수도 있다. 역시 지도자를 잘 골라야 한다.

글=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일러스트=강일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