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이념―욕망 사이서 '케이티'의 번민 관객 허 찔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오늘 이 땅에는 두개의 전선, 즉 '욕망 전선'과 '이데올로기 전선'이 엎치락뒤치락 머물고 있습니다. 이는 계간 『문화과학』을 펴내고 있는 중앙대 강내희 교수의 지적이자 지난 4일 열렸던 이 잡지 창간 10주년 심포지엄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욕망/이데올로기의 대립 구도로 '현존하는 한국'을 들여다보는, 좀 색다른 접근을 시도했습니다. 영화의 경우도 이 잣대에서 동떨어지지 않습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중 '울랄라 씨스터즈'(출세·돈)'결혼은, 미친 짓이다'(사랑·섹스)'스파이더 맨'(초능력·악의 퇴치)'커먼 웰스'(돈)등에는 욕망이 넘쳐납니다. 반면 '마제스틱''위 워 솔저스''리빙 하바나'에는 이데올로기와 예술·가족애 등 가치를 추구하려는 욕망이 치열하게 부닥칩니다.

일본 사카모토 준지 감독의 '케이티(KT)'는 후자입니다. 1973년 8월 8일 일본 도쿄에서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감안하면 영화는 얼핏 뻔한 근현대사 정치 필름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감독의 영화 다루는 솜씨는 그리 간단치 않습니다.

1970년대 초 '손발 묶인 군대 아닌 군대'자위대의 무기력함에 좌절해 있던 도미타(사토 코이치) 소령에게 상부 인사(박정희 대통령과 일본 육사 동기로 설정됨)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한국 중앙정보부(KCIA) 요원 김차운(김갑수)과 접선해 흥신소를 차리고 'KT 프로젝트'에 협력하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관객의 허를 찌릅니다. 당연히 피해자인 김대중씨를 주인공으로 삼았을 법한데도 정작 김차운과 도미타 등 가해자들의 '흔들림'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온몸에 고문의 상처를 안고 일본에 온 한국의 대학생 이정미(양은용)는 물론 그녀를 사랑하는 도미타도 갈피를 잡지 못합니다. 김차운이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되뇌는 부분에서 패배감은 정점으로 치닫습니다.

영화의 구성은 다소 복잡하고 감독이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무겁습니다. 가령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던 작가 미시마 유키오가 70년 말 '천황옹호'등을 주장하며 자위대 총감실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일본의 B급 좌파기자와 재일동포 2세 청년 등 여러 등장 인물의 의미를 따라잡기도 쉽지 않습니다. 요즘 주류 관객들이 선호하는 흥행 코드를 고의로 외면한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흐름을 잘 읽은 관객들에게 영화는 각별한 작품으로 다가섭니다. 도쿄대 강상중 교수는 일본 시사회 직후인 2월 한 칼럼을 통해 "섬뜩한 권력의 그림자에 등골이 오싹했다. 다시 보기 힘든 수작"이라고 말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진실에 근접한 것으로 보이는 영화적 상상력'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내외 여러 영화제가 '케이티'를 주목한 것도 같은 맥락일 듯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아무래도 지워지지 않습니다. KT 프로젝트 실패 후 도미타는 이정미와 사랑을 이룹니다. 하지만 두 사람 만남의 자리에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뛰어드는 승용차와 곧 이어 들려오는 한발의 총성-. 도미타는 쓰러집니다. 소박한 삶의 욕망도 함께 무너집니다. 혹시 우리 모두의 슬픈 자화상은 아닐지 모를 일입니다.

대중문화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