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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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주안댁은 나를 다시 꼼꼼히 살펴보더니 한 손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다른 손으로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 안되겠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까 너 우리 집으로 가자.

그녀는 전쟁 뒤에 새로 생겼다는 피란민 동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언덕바지에 날림으로 지은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골목은 오불꼬불했다. 미군부대에서 나온 합판과 상자를 뜯어서 집의 얼개를 만들고 지붕은 검은 콜타르를 바른 루핑으로 덮은 집들이었다. 바닷바람에 날아가지 말라고 지붕 위에 커다란 돌들을 얹어놓았다. 수도는 물론 전기도 없는 동네였다. 전후에 우리 동네 너머에 그런 집들이 많이 생겨났고 나는 같은 반 아이들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서 별로 낯설지 않았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낮은 지붕 아래 창호지를 바른 작은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고 식구들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뒤에 나는 얼마나 많은 타향의 길과 골목에서 그런 창문들을 보아왔던 것일까. 가끔 창 밖으로 고개를 내민 낯선 사내나 내 또래의 젊은이가 의심이 가득찬 시선으로 나를 내다보다가 얼른 안으로 사라졌다. 어느 먼 고장에서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 반갑고 익숙한 향그러운 냄새가 배어있는 과일가게 앞을 지난다든가, 아니면 아이들이 법석대며 뛰노는 가난한 동네의 골목을 지날 때 어디선가 꽁치를 연탄불에 굽는 냄새가 풍겨오면, 나는 문득 집 생각이 나곤 했다. 어느 중국의 시구에서처럼 그 마음은 '화살'과도 같았다.

- 이제 오나?

발소리를 듣고 알았는지 저만치에서 먼저 길쪽으로 문이 열리며 거뭇한 어른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 엄마아!

하면서 나보다 조금 큰 여자 애가 뛰어나와 아줌마의 장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문을 열자마자 비좁은 부엌이었고 디딤돌 위에 문턱이 보였다. 여자 애와 남자는 어리둥절해서 나와 아줌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 길 잃은 앤데....내일 데려다 주려고.

주안댁네 식구는 모두 다섯이었다. 주안댁, 남편, 맏딸, 아들, 그리고 막내가 있었다. 남편은 솜씨 좋은 목수여서 그 시절에 집 지을 일이 많아 일자리는 떨어지지 않고 연이어 있었지만 막일 하는 사람들이 거의 그렇듯이 허리가 신통치 않았다. 나중에 그녀가 어머니와 친해져서 언니 동생 하면서 오가는 중에 친척처럼 내막을 서로 알게 되었다. 목수 아저씨는 공사장에서 비게를 타고 오르내리다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는데 아줌마에게는 '그놈의 술이 웬수'였다. 그 집 딸은 초등학교를 나와 집에서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고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간 뒤에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 다행히도 엄마가 자기 노점 부근에 좌판을 마련해 주어서 모녀와 사위가 함께 생선장수를 했다.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였던 그집 아들은 군대 간다고 인사를 왔던 생각이 나는데 그 뒤에 소식이 끊겼다. 막내는 계집아이였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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