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근심어린'佛대선 축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재선 확정 다음날인 6일 프랑스의 모든 언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2주 전 프랑스에 상륙한 태풍 '르펜호'를 무사히 막아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랑스 국민의 80% 이상이 참여한 반(反)극우 연대의 완승을 자축했다.

유럽 언론도 프랑스 민주주의의 승리에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 속엔 불안과 우려가 섞여 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는 "기뻐하자. 그러나 너무 좋아하지는 말자"고 충고했다. 시라크 대통령의 압승 뒤에는 '터무니없는 비전을 제시하는 늙은 포퓰리스트의 지지층'이 엄존하기 때문이다. 국민 다섯명 중 한명 가까이가 그런 사람이라면 이는 분명 마음을 놓지 못할 수준이다.

이탈리아의 유력지 레푸블리카 역시 "시라크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상처는 치유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극우파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숙제라는 얘기다.

스페인의 중도좌파 신문 엘파이스의 논평은 보다 신랄하다. 프랑스와 시라크를 '빈사상태에 빠진 공화국의 신뢰 잃은 대통령'이라고 몰아붙였다.

독일의 베를리너 차이퉁도 극우파에 대한 공포가 '양심에 어긋나는 투표'를 강요했다고 썼다. 유럽 언론의 근심을 벨기에의 중도우파 신문 라리브르 벨지크가 요약한다. "유럽 국가들은 프랑스의 극우 신드롬이 자국에서 재연되는 사태를 우려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이탈리아·네덜란드·덴마크 등에서 극우파는 이미 제도 정치권에서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네덜란드의 극우파 지도자 피살 사건은 극단을 제거하기 위해 만들어진 또 다른 극단의 상징이다.

프랑스의 많은 국민은 사회·경제·정치적 불안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그중 일부가 "그런 현실을 싹 쓸어버리겠다"고 호언한 장 마리 르펜에 기댔다.

불안한 현실의 원인을 외국 이민자 탓으로 돌리는 궤변을 따져볼 겨를도 없었다. 비전 없는 좌·우파의 정치놀음에서 대안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정치권이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다. 이는 비단 유럽에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다. 극단적 움직임의 온상은 정치권의 지도력 부재라는 프랑스 대선의 교훈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 크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