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9, 전통적 棋理 외면한 현대수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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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제1보 (1~16)=이번 예선전에서 이현욱4단은 대진운이 좋았다. 계속해 세판을 '노장'들과 대국하며 수월하게 결승전에 진출한 것인데 이런 경우는 흔하지 않다. 결승전의 상대는 안조영7단. 요즘 이창호9단과 패왕 타이틀을 놓고 쟁패중인 신진 강호다. 하지만 李4단은 비축된 힘으로 安7단을 꺾고 95년 프로 데뷔 이후 처음 왕위전 본선무대를 밟았다. 올해 22세. 서울 출신.

3월 18일 오전 10시. 서봉수9단이 李4단의 인사를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짧은 머리에 구릿빛으로 탄 얼굴이 한결 건강해 보인다. 2000년 왕위전 도전자가 되어 춘천의 옥광산에서 이창호9단과 싸웠던 徐9단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당시 徐9단은 선두를 달리던 이세돌3단을 두번 연속 꺾고 도전자가 됐다. 도전기를 준비 중이던 춘천에선 '왕위 이창호9단 대 도전자 이세돌3단'이란 플래카드를 내걸었다가 황급히 교체하는 해프닝을 벌여야 했다. 徐9단의 흑 차례.5,7의 전개와 8의 갈라치기까지 눈에 익은 유행포진이다. 그러나 9의 옆구리 붙임은 최근의 수법으로 강렬한 승부호흡이 느껴진다. 소위 '한국류'라 이름붙일 수 있는 실전적인 수법이다.

하나 흑9는 '약한 돌에 붙이지 말라'는 기훈(棋訓)을 외면하고 있다. 돌이란 서로 부딪치면 강해지는 속성이 있으므로 약한 돌에 붙이는 것은 기리에 어긋난다. 그러나 흑은 공격보다는 우하의 흑모양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런 식의 노골적인 수법은 과거 우칭위안(吳淸源)9단이 자주 사용하기도 했다.

15는 A에 젖혀가는 수도 있지만 徐9단은 평범하게 받았고 李4단은 곧장 16으로 쳐들어왔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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