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國技는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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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화투의 고스톱이 한국의 국기(國技)라는 조크가 있다. 한국사람들은 모여 앉았다하면 대화나 토론보다는 고스톱판부터 즐겨 벌이기 때문이다. 며칠전 미국의 워싱턴 포스트는 '일본과 한국:월드컵의 서먹한 동침자들'이라는 도쿄발 기사에서 "한국의 월드컵열기는 그들의 진정한 국기인 정치와 씨름 중이다"고 꼬집었다.

택시기사는 물론이고 한국사람치고 '정치평론가'아닌 이가 없다는 것은 새삼스런 얘기가 아니다.'노풍'(風)회오리에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져나오는 권력형 비리와 부패, 그리고 이를 둘러싼 정치공방 속에 한국의 정치는 날 새는 줄 모른다. 오죽하면 '한국이 월드컵 개최국이 맞느냐'는 핀잔까지 쏟아졌을까.

정치에 대한 높은 국민적 관심이 나쁠 리 없다. 문제는 정도가 지나쳐 모든 것이 '정치화'되는 데 있다. 이번 월드컵이 어떤 대회인가. 88올림픽이 한국의 대외적 도약에 디딤돌노릇을 했다면 2002 월드컵은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로 실추된 한국의 국가이미지를 회복시키고 한단계 격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월드컵은 축구를 매개로 세계각국이 종합적인 국력을 재는 주요한 각축장이자 정치·외교·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이해와 협력을 도모하는 소중한 무대다. 공동개최국 일본과 일거수 일투족이 전세계에 그대로 비교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국가적 긴장은 더하다.

물론 각종 게이트와 비리 의혹은 법에 따라 철저히 규명되고 단죄돼야 한다. 다만 세계가 우리를 주목하는 현시점에서 지나친 정치공방과 장외투쟁은 '부패공화국'을 스스로 대외에 광고하는 꼴밖에 안된다. 판단은 사법당국에 맡기고 들끓는 정치적 에너지를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에 모을 때도 됐다.

이미 80년대에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우리가 아닌가. 당시는 권위주의적 체제 아래 정치인·학생·근로자 할 것 없이 모두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접어둔 채 우리 사회의 축적된 역량을 하나로 모았었다. 지금 우리의 대내외적인 성숙도는 당시와는 비교가 안된다. 제왕적 대통령 및 당총재의 시대가 가고 반도체와 휴대전화 등 정보기술(IT)제품 강국에다 삼성전자·포스코·현대자동차 등 글로벌 거인들의 출현이 꼬리를 물고 있다. 35만 관람객과 연인원 6백억명의 세계시청자들에게 우리의 성숙된 모습을 보여주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국가마케팅'이 절실하다.

그러려면 싸워 이기는 축구로 16강에 집착하기보다 세계적 스타들의 멋진 플레이에 박수를 보내는 '즐기는 축구'가 그 출발점이 돼야 한다. 정치에 쏟아붓는 열정과 에너지로 월드컵에 매달린다면 '만점 올림픽'을 연출한 시드니의 감동을 우리가 재현 못할 것도 없다. 월드컵기간만이라도 여야 대선후보가 정치공방을 멈추고 성공적 개최를 주도함으로써 한국정치의 성숙함과 역동적 모습을 대내외에 과시해야 한다.

한국대표팀 히딩크 감독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 것'이라고 다짐했다. 16강 진출은 떨쳐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회진행과 안전확보·시민의식·경제·문화 등 경기외적 월드컵에서 한국이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일이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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