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 추천 美출판사 책 『벼랑 끝…』 국내시장 저작권 과열경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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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지난달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벼랑 끝에 선 호랑이』(원제 Tiger on The Brink-Jiang Zemin and China's New Elite,캘리포니아대 출판부)란 책을 임원들에게 읽도록 권한다는 이야기가 보도됐다(본지 4월 15일자 33면). 중국 장쩌민(江澤民)주석의 정치 역정을 정리하고 중국 정치 엘리트의 인맥과 성격을 분석한 책인데 회장은 "중국의 (위기에 대한) 대응 전략을 명심하자"는 취지로 추천했다고 한다.

그런데 회장이 임원들에게 던진 이 말이 출판계에 적잖은 영향을 주고 있다. 출판사 여러 곳이 이 책을 번역해 출간하겠다고 한꺼번에 나선 것이다. 그간 캘리포니아대 출판부의 책을 소개해 왔던 한 에이전시는 처음에는 계약 성사에 별 문제가 없을 것으로 내다봤다.

저작권 계약 업무를 10년째 해온 이 에이전시는 한국 출판사간에 경쟁을 붙이기보다는 외국 출판사들 쪽에서 한국 시장과 저자의 지명도를 고려해 적정 가격을 제시해 보라는 나름의 원칙을 지켜왔다고 자부하는 곳이다. 그런데 사정이 달라졌다.

관례상 자신들을 저작권 판매 통로로 삼을 줄 알았던 캘리포니아대 출판부가 한국 에이전시 모두에게 주문을 받겠다고 한 것이다. 여러 에이전시가 이 책에 관심을 보였고 자연히 가격은 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캘리포니아대 출판부는 한 에이전시가 제시한 계약 조건을 다른 쪽에 알려주는 등 값을 올리라는 은근한 압력을 넣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작권 향방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이는 한국의 저작권 계약 행태가 빚은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다. 영미권 출판사 입장에서는 한국 출판사들끼리 앞다퉈 값을 올려주는 모습이 처음에는 이상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다 한국 시장에서 '돈이 될 만한' 출판물을 잘만 요리하면 저작권료 올리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간파했는지 모른다.

한국 출판사들은 내용이 좋고 삼성 임직원이라는 거대 독자군이 흥미를 가질만한 이 책에 욕심을 낼 만하다. 그러나 에이전시·출판사가 값 올려주기 경쟁을 자제하지 않는 한 영미권 출판사의 입김은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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