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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텐토트 비너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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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로 치닫던 1907년, 대한매일신보가 울분을 담아 보도했던 '조선동물'사건이 있었다. 이해 5월 일본 도쿄에서 '메이지(明治) 40년 박람회'가 열렸는데, 전시장 내 조선관에는 살아있는 조선인 남녀가 '진열'됐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상투를 튼 남성과 치마·장옷차림 여성이 희귀동물인 양 전시된 데 격분해 본국에 알린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일본인들은 박람회장을 나오면서 "조선동물 2개가 있는데 참 우습더라"며 낄낄거렸다는 것이다. 당시 서양이나 일본에 조선인은 미개인으로 비쳤다.

1904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린 제3회 올림픽대회에서는 '인류학의 날'이라는 명목으로 이틀간 번외경기가 열렸다. 미개인들이 근대 스포츠에 잘 적응하는지 알아보자는 취지였다. 아메리카의 수족 인디언, 멕시코 코코파족, 아프리카 피그미족, 필리핀 루손섬의 이골로트족 등이 동원됐다. 경기는 올림픽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멕시코 인디언 줄리아 파스트라나는 여성인데도 흉칙한 얼굴에 온몸이 털투성이였다. 그는 1854년 흥행사의 꾐에 빠져 구경거리로 미국 땅을 돌다가 런던으로 건너갔다. '인간과 오랑우탄의 혼혈'로 불리며 유럽인의 호기심을 채워주다가 1859년 출산 중 숨졌다. 그러자 흥행사는 산모·아기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또 돈벌이에 나섰다. 파스트라나는 생존시기를 포함, 1970년대까지 1백10여년이나 노리갯감이 되어야 했다.

1789년 태어난 아프리카 남부 코이코이(네덜란드어로 호텐토트)족 여성 사르지에 바트만(사진)도 비슷한 운명이었다. 튀어나온 엉덩이 등이 영국 의사의 눈에 띄어 1810년부터 유럽의 서커스단·박물관·술집을 전전하다 6년 후 사망했다. 프랑스 과학자들은 '호텐토트 비너스'로 불리던 그녀를 해부하고 유해 일부를 박물관에 전시했다.

코이코이족은 1995년부터 바트만 유해 반환운동을 펼쳐왔다. AFP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29일 2백년 가까이 '인간전시품'으로 모욕당하던 바트만의 유해가 드디어 남아공 정부에 인도됐다. 남아공은 그녀를 고향땅에 안장하고 기념관도 세울 예정이다.

'조선동물'이나 바트만의 비극이 옛날이나 먼나라 일이기만 한 것일까.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나와 다름'에 대한 차별은 요즘도 되풀이되고 있다고 본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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