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쌀 개방 반대 시위만이 능사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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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쌀개방 협상을 반대하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 수천명이 20일 한강 다리와 서울시내 간선도로 곳곳을 점거하고 기습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시위를 벌이는 동안 해당지역의 차량 통행이 마비되면서 주변지역에 극심한 교통침체가 빚어졌다. 다리와 도로를 점거하고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농민들을 보는 시민들의 표정은 이제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불황에 지친 도시민들 입장에서 생계의 발목을 잡는 시위가 달가울 리 없다.

농민들의 주장은 "쌀개방 협상 무효, WTO 반대"다. 보다 직접적으로 말하면 쌀시장을 아예 개방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이 같은 주장이 쌀농가 이외의 일반 국민에게 얼마나 먹혀들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다. 농민들은 지난주 '쌀협상 국민대토론회'의 회의장을 점거해 토론 자체를 무산시켰다. 정부가 국제적인 약속에 따라 벌이는 협상도 인정할 수 없고, 토론도 못하겠다면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우리는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이후 지난 10년간 정부의 농업정책이 실패했음을 이미 수차례 지적했다. 쌀시장 개방에 대비해 10년간 70조원을 퍼부은 끝에 남은 것은 농업 경쟁력의 후퇴와 농가 빚뿐이다. 그러나 이 같은 실패의 책임은 정부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정부 못지않게 농민들 스스로의 책임도 크다는 것이다. 시장 개방에 직면한 쌀 농가의 어려움을 모르는 게 아니다. 그러나 쌀시장 개방은 이미 10년 전에 예고된 것이었다. 그 기간에 막대한 국민 세금이 농촌에 투입됐고, 온 국민이 국제가격의 5배에 이르는 값에도 군말 없이 국산쌀을 사주었다. 지금 국내 쌀 생산량은 한 해 소비를 충당하고도 남아 몇 년째 창고에서 썩어가고 있다.

이런 사정을 도외시하고 막무가내식의 시위를 벌인다고 쌀개방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농민단체들도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정부의 지원이 낭비되지 않고 농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현실적인 대안을 가지고 나와야 한다. 무리한 요구와 대안 없는 과격시위로는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