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푸르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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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1970년 3월 19일 오전 9시30분.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에어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빌리 슈토프 동독총리는 "귀하가 동독 땅을 밟게 된 것을 환영합니다. 나의 초청을 수락해 준 데 대해 감사합니다"라고 짧게 인사했다. 연도에는 수천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나와 '빌리'를 연호하며 환영했다. 20년 뒤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된 역사적인 동·서독간 첫 정상회담은 이렇게 시작했다.

구동독 튀링겐주 수도인 에어푸르트는 이처럼 독일 역사의 절목(節目)마다 등장하는 고도다. 올해로 시 창립 1천2백60년을 맞는 에어푸르트는 지정학적으로 독일 중부에 위치한 데다 중세 때 금 값과 맞먹던 청색염료의 주산지여서 상공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학문 장려에도 힘써 조선이 개국하던 1392년 대학을 설립했다. 하이델베르크·쾰른에 이어 독일에서 세번째지만 교육제도가 뛰어나 '북쪽의 볼로냐'로 불렸다. 이후 에어푸르트는 독일 인문주의의 중심지가 된다.

이 도시를 특히 유명하게 만든 인물은 마르틴 루터다. 1501년 에어푸르트 대학에 입학한 루터는 10년간 이곳에서 법률과 신학을 공부하면서 종교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다. 당시 루터는 이곳을 '에르포르디아 투리타'(탑이 많은 에어푸르트)로 불렀다. 그만큼 첨탑을 가진 성당과 저택이 많을 정도로 번화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에어푸르트는 한번도 왕이나 제후들의 수도가 된 적이 없다. 이 때문에 과거 왕국이나 공국의 수도였던 독일의 웬만한 도시엔 크건 작건 성이 있지만 이곳에는 봉건주의의 상징인 성이 없다. 이런 배경을 고려했는지 독일 사민당은 1891년 이곳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마르크스 주의를 전적으로 수용한 '에어푸르트 강령'을 채택한다. 이 때부터 에어푸르트는 좌파들의 정신적 고향이 된다. 복종과 굴복의 역사가 없는 '시민의 도시'란 사실에 이곳 시민들은 아직도 자부심이 대단하다.

그 에어푸르트가 다시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이번엔 수치스런 일로 역사의 한 장을 쓰게 됐다. 지난주 이곳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전후 독일 역사상 최대 규모인 데다 스승들을 골라 살해한 최악의 패륜사건이었다. 에어푸르트 시민들은 총을 겨눈 범인 제자에게 "나를 쏘라"고 호통쳐 희생을 줄인 참스승의 용기에 그나마 한가닥 위안을 얻고 있다.

유재식 베를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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