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력 잃은 아버지 엉뚱한 대답에 망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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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28일 금강산에서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안타까운 사연들이 줄을 이었다.

길영진(81)씨는 6·25 피란 때 생이별한 부인 이영희(75)씨와 아들 창근(55)씨를 상봉하고도 한동안 서먹서먹해 했다. 吉씨는 20대에 혼자 된 뒤 수절해온 아내와 만나자마자 "미안하오. 모두가 내 잘못이오. 하지만 지난 세월은 모두 묻기로 합시다"라며 손을 부여잡았다.

연신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적시던 부인 李씨가 아들 가족의 소식을 전해주자 吉씨는 "아내가 애들을 데리고 내 고향인 평북 선천으로 간 사이 내가 피란하는 바람에 생이별을 했다"며 미안해 했다.

6·25 때 단신 월남한 김종선(83)씨는 북한에 두고 왔던 딸 현숙(58), 아들 석영(55)씨를 만나자 "지난해 두차례나 상봉을 한다 못한다 소동을 겪어 상심이 컸다"며 실감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딸 현숙씨는 "아버지, 어머니 이름은 아세요. 어디 사셨는지는 아냐구요"라며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나 청력이 약해진 金씨가 엉뚱한 대답만을 연발하자 아들·딸은 어쩔줄 몰라했다.

여종숙(78)할머니는 단체 상봉장에서 품속에 간직해온 편지를 꺼내 시동생과 조카들에게 건넸다. 남편인 허창극(80)씨가 워드프로세서로 직접 작성한 편지였다.

許씨는 편지에서 "57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구나. 인생이 너무 허무하구나"라고 밝힌 뒤 "이 편지를 보는 즉시 북에 있는 가족상황을 자세히 기록해 형수편에 보내주기 바란다"고 적었다. 呂할머니는 "이산상봉 신청 결과 할아버지는 떨어지고 나만 붙어 편지를 대신 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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