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기조 바꾼다는데… 국민 신뢰가 문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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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의 새로운 국정기조는 바로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중반기 구상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국정기조가 바뀐 것 아니냐는 지적에는 거부감을 보인다. 김종민 대변인은 "노 대통령의 새해 국정운영 구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초점이 달리 맞춰지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노 대통령의) 합리적 실용주의 노선은 하루아침에 생겨난 게 아니라 일관된 국정 철학"이라는 논리다.

◆ 실용주의 노선 부상=이를 감안하더라도 여권 기류가 바뀌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소수에 불과했던 실용주의 노선이 여권 내 핵심 인사들의 '합치된 의견'인 것처럼 부각되기 시작하는 분위기다.

우선 청와대의 김우식 비서실장과 정찬용 인사수석이 그동안 흔들리는 듯했던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유임 방침을 거듭 확인하며 경제팀에 안정감을 실어주고 있다. 개각을 앞둔 시점에서 청와대가 앞장서 경제부총리 유임을 강조한 것은 관가는 물론 재계 등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특히 이 부총리는 경제에 관해 노 대통령의 의중을 가장 잘 읽고 있다고 알려진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과 종부세 등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해 왔다. 그로 인해 과천 경제부처 등에서는 한때 그의 경질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까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가 이 부총리를 적극 감싸고 나서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했다. CEO 출신으로 미국 지식인 사이에 폭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신임 주미대사에 내정해 한.미 동맹의 강화 의지를 분명히 보여준 점도 상징하는 바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임 주미대사 내정자가 평소 대북 교류.협력 등의 문제에서 유연한 사고를 밝혀왔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은 왜 이런 변화를 결심했을까.

◆ "4대 입법에 에너지 낭비 안 되게"=우선 참여정부의 개혁작업이 어느 정도 성과를 냈다는 스스로의 평가가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대선자금 수사와 17대 총선을 거치면서 정치개혁이 마무리됐고, 최근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경제개혁의 디딤돌이 마련됐다는 것이 여권의 자평이다.

보안법 폐지 등 4대 입법은 여전히 국회에 머물러 있지만, 정치와 경제 개혁이 실질적 개혁이라면 이는 '상징적 개혁'의 성격이 크다는 판단도 작용했다고 한다. 법의 개폐 문제가 실제 국정을 운영해 나가는 데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노 대통령이 보안법 문제 등과 관련, 이부영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에 "산이 높으면 돌아갈 수도 있다"고 말한 것에도 이 같은 인식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노 대통령은 지난 17일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대표에게 "4대 입법과 관련해 지나치게 에너지가 낭비돼서는 안 된다. 큰 원칙이 훼손되지 않는 선에서 조속히 매듭지어졌으면 한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여권 핵심 인사는 "집권 2년간 국정의 로드맵을 만들었다면 이제는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할 시점이고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할 시기도 3년차인 내년밖에 없다는 판단도 국정 기조 변화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내년 경제 상황이 호전되기 어렵다는 것이 경제계와 학계의 지배적 전망이란 점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 대기업CEO와 접촉=이와 관련, 여권의 가장 큰 고민은 새 국정 기조가 실효를 거두려면 국민적 신뢰가 뒷받침돼야 한다는 데 있다. 이는 노 대통령이 지난 2년간 내내 시달려왔던 숙제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이 이헌재 경제부총리를 임명하면서 한 측근에게 '참여정부의 경제 철학과 배치된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분을 임명한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람을 시키면 세상이 믿어주지 않겠느냐는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국민적 신뢰 확보에 대한 대통령의 고민을 보여주고 있다.

"대기업과 야당 등에서 어느 정도 믿고 따르거나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국정기조 변화의 추진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게 여권 내의 시각인 것이다. 최근 주요 대기업 최고위 관계자와 청와대가 접촉을 시작한 것도 상호 신뢰관계 없이는 자발적인 투자확대로 이어지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라고 한다.

이수호.김선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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