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之間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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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맹자에게 물었다. "군자는 왜 자기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나요?"

맹자의 대답. "가르쳤는데도 제대로 실천하지 않으면 분노하고 성낼 것이며, 아들 또한 '나보고는 바른 길을 가라고 하시면서 왜 아버지는 그렇지 못한가요'라며 대들게 된다. 아비와 자식이 서로 의가 상하면 좋을 게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자식을 바꾸어 가르쳤다."-맹자 이루(婁)편에 나오는 얘기다.

굳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추지 않더라도, 부자간의 팽팽한 긴장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자기 핏줄에 기대를 품게 마련인 아버지는 기대가 어긋나면 화부터 내고 심한 경우 따귀를 올려붙이게 마련이다. 자식 입장에서 달가울 리가 없다. 그러나 손자나 할아버지로 한 단계만 건너뛰어도 이런 긴장관계는 눈녹듯 사그라진다.

옛날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한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았다. 겸상을 하다 보면 아버지는 아들의 모자란 점을 자꾸 지적하며 다그치고, 아들은 반발하게 되기 때문이다. 조선 중종 때 황해도 연안에서는 이동(同)이란 사람이 아버지와 한 상에서 식사하다 시비가 붙어 밥사발로 아버지를 내리친 사건이 벌어졌다. 이동은 사형당할 뻔 했으나 '인륜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이라는 이유로 관대한 처벌을 받는 데 그쳤다.(정연식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

우리 조상들은 또 맹자의 지적 대로 자식 글공부를 서로 바꾸어가며 시켰다. 할아버지나 삼촌, 부친의 친구가 교육을 맡았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어릴 적에 글을 배운 스승도 부친(이지번)이 아니라 '토정비결'로 유명한 삼촌 이지함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이 '홍(弘)3'이란 말로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과거 金대통령이 '옥중서신' 등에서 토로한 아들들에 대한 연민과 회한이 화제로 떠올랐다. '자식들에 대한 나의 죄가 너무도 무거운 것이라는 생각에 비통하다'는 표현까지 눈에 띈다. 그렇다고 측근들이 "법대로 하자"는 말마저 못꺼낸다는 것은 이상하다. 법에 어긋나면 어긋나는 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처리하면 될 일이다. 자식이 소중하고 안타깝기는 대통령이든 막일꾼이든 누구나 마찬가지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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