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국어 매력에 흠뻑 하루 12시간씩 15년 작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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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조선시대 중국어 번역어와 한글 용례를 모아 놓은 9권, 1만여쪽짜리 『중조대사전(中朝大辭典)』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조선시대 번역문헌을 바탕으로 한자, 한자어, 당시 중국어인 백화(白話) 등을 조사·정리하여 표제자 1만2천여자, 어휘 6천여개, 42만여개에 달하는 풍부한 한글 번역 용례를 중국어 발음 순으로 담은 '거대한 프로젝트'를 겁없이 이뤄낸 박재연(선문대·중문학)교수. 그의 빈약한 체격과 조용한 말투에서 '한 인간의 위대성'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올해 45세인 그가 15년간 하루에 12시간씩 작업한 결과는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1980년대 초 금서였던 중국의 사회주의 문학작품에 심취해 20여종을 번역·소개했다. 법률적으로 '일용잡급직'으로 대접받는 강사 시절 먹고 살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것도 필력의 부족을 느껴 8년 만에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 경험은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크게 도움이 된다. 조선시대 외국소설을 연구한 그는 당시 한글로 번역된 중국의 통속소설인 백화 소설을 수집·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선시대 중국어와 우리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그는 당시에 번역된 모든 문헌을 뒤져 중국어 원전과 일일이 대조하면서 카드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송(宋)·원(元)·명(明)·청(靑)대의 이야기 책인 화본(話本)을 비롯,『삼국지』 『수호지』 『금병매』 등에 나타난 구어체(口語體)인 백화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당시 역관들이 사용한 교과서 『노걸대(乞大)』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가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1차 작업이 끝나자 욕심이 생겼다. 한글창제 이후 번역된 『천자문(千字文)』 등의 자서(字書)와 『사성통해(四聲通解)』같은 운서(韻書)를 포함시켰다. 이어 『두시언해(杜詩諺解)』등 자료로도 확대시켰다. 이렇게 분석한 자료가 총 2백30여종 1천여책을 넘어섰다.

처음에 손으로 했던 작업이 컴퓨터의 활용으로 속도가 빨라졌다. 대신 루마니아 바이러스에 걸려 3개월치 작업이 날아가 며칠간 술로 지샌 적도 있었다.

이번 사전에 대해 학계에서는 '파천황의 대발상''인류문화의 유산'(건국대 임동석 교수), 혹은 '한 인간의 위대성의 결과'(한국기술교육대 정재영 교수)라고 평가한다.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풍부한 용례다. 가령 '천(天)'이란 표제자에는 『두시언해』를 비롯, 모든 문헌의 용례를 찾아 기록했다. 아울러 조선시대 한글이 실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 있어 국어학 연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동안 학술진흥재단·국립국어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등에서 지원한 연구비와 본인이 들인 1억5천만원으로 작업을 해왔다. 컴퓨터 입력 아르바이트 비용으로도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다행히 선문대(총장 이경준)가 그의 업적을 높이 사 제작비 1억5천만원을 내놓았으며, 나아가 향후 5년내 20여권으로 확대 증보판을 내기 위해 아예 중한번역문헌연구소를 설립, 지원해줄 예정이다.

글=김창호 학술전문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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