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공식 정치 해체하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처음에는 신중하고 끝에 가서 태만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니 바라건대 끝까지 신중하기를 처음같이 하여라(愼終如始)." 조선 초 한시대를 호령했던 정치가 한명회(韓明澮)가 죽기 전 자신의 생을 되돌아보면서 남긴 말이다. 임기 말에 와있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지켜보면서 자꾸 이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돈으로 움직이는 私조직

1998년 온국민은 상당한 기대를 갖고 '준비된 대통령'의 탄생을 지켜보았다.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였으며, 평소 서민의 애환을 대변해온 사람이 대통령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4년여가 지난 지금 대다수 사람은 '혹시나'가 '역시나'였다고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국민의 판단은 현정부가 지난 4년동안 시행한 정책에 대한 엄밀하고도 객관적인 평가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근자에 잇따라 터지고 있는 대통령 아들들과 측근들의 비리문제가 국민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정치가 덜 발달한 나라일수록 공식 정치 보다는 비공식 정치가 기승을 부린다. 정치가 공적으로 확립된 제도와 규칙 및 절차에 따라 이뤄지기 보다 학연·지연 등에 기초한 사적 조직이나 비선(?線)조직에 주로 의존할 때 우리는 비공식 정치가 공식 정치를 대체했다고 말한다. 쉽게 표현하면 사조직이 판을 친다는 말이다. 이러한 비공식 정치를 운영하자면 비용이 많이 든다. 사조직은 돈이란 휘발유를 넣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의 고질적 병폐인 '고비용' 문제도 바로 여기에서 발생된다.

그런데 최근 대통령 아들들이 연루된 온갖 비리사건은 우리 정치의 특징인 비공식 정치나 고비용 정치와는 차원이 다른 개인적 부패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정치학자 로웰 디트머는 공식·비공식 정치와 부패를 목적의 공사(公私) 여부와 수단의 정당성 여부에 따라 이렇게 구분하고 있다. 공식 정치가 공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정당한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라면, 비공식 정치는 같은 목적을 정당치 못한 수단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다. 반면 사적인 목적을 위해 정당하지 않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부패다. 이러한 구분에 비춰볼 때 '홍 트리오'의 비리는 고비용 정치구조라는 현실 아래서 정권 재창출과 사조직 유지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권에 손을 댔던 과거의 정치적 스캔들과 그 종류가 다르다. 그것은 명백히 개인적 치부를 목적으로 온갖 이권에 개입한 부패다.

'홍 트리오'의 비리의 성격이 비공식 정치가 아닌 부패라고 하여 둘 사이에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비공식 정치의 번성은 이러한 부패가 싹틀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고 있다. 비공식 정치가 만연할 때 높은 정치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비리도 생겨나지만 그 와중에 최고 권력자와의 사적 관계를 빙자해 사복(私腹)을 채우는 일도 발생한다.'홍 트리오'의 비리가 바로 그 경우다.

따라서 되풀이되는 대통령 아들 부패문제의 해결방안도 그것의 토양이 되는 비공식 정치를 없애는 데서 찾아야 한다. 한국 정치의 비공식 부문의 온상은 온갖 종류의 사조직이다. 민주산악회·연청·아태재단, 갖가지 비선조직 등이 그 대표적 예다. 이것은 고려나 조선 초의 사병(私兵)에 비견될 수 있다.

私腹 채우기 불씨 제거를

봉건시대에도 나라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호족이나 공신들이 보유한 사병을 혁파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날 정권을 잡은 후에도 이런 조직을 그대로 두거나 명목상으로만 공조직으로 탈바꿈시킨다면 그 결과가 어떻겠는가. 그것을 운영하는 막대한 비용은 어떻게 조달할 것이며, 한몫 잡아보기 위해 그곳에 꾀는 사람들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산은 오를 때보다 내려갈 때가 위험하고 얼음도 녹을 때가 위험하다고 한다. 이맘때면 어느 대통령이든 레임덕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아들의 비리가 터져나와 국정을 마비상태로 몰고가곤 한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은 정치의 비공식 부문을 모두 해체시키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것은 차기 대통령을 바라는 후보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