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22>제101화 우리서로섬기며살자 :21. 은인 칼 파워스 상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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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그때 칼 파워스 상사는 나보다 겨우 여섯 살 위였다. 그가 1990년 초에 펴낸 회고록 『한 가슴의 소리(A Heart Speaks)』를 읽고서야 나를 미국으로 데려간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트럭에서 내리는데 한 소년이 눈에 띄었어요. 트럭 옆에 서서 마치 미군들과 오랫 동안 알고 지낸 것처럼 깍듯이 인사를 하고 있었던 거죠. 문화와 피부색이 다른 한 작은 소년이 미군들에게 신뢰를 가지고 존경과 헌신, 친절과 온유함을 보이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단테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후 곧바로 입대한 파워스 상사는 전쟁의 와중에 부모를 잃은 어린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어린이 한 명이라도 자신의 손으로 구해야겠다고 하나님과 약속을 했다는 것이다.

다음날부터 그는 나에게 영어를 가르쳤지만 곧 우리는 헤어질 운명이었다. 미군이 북쪽으로 진격할 때 내가 하우스보이를 맡았던 부대원들과 파워스 상사가 소속된 부대원들이 맡은 임무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내 주제에 무슨 미국!'이라고 맘을 달래며 기대를 접었다.

우리 부대가 잠시 안성에 머무를 때, 나는 그동안 모은 담배와 초콜릿, 통조림 등을 나무 궤짝에 담아 수원 집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형님에게 이렇게 말했다.

"형님, 이 물건 팔아서 소와 마차를 사세요. 그 대신에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나 학교 보내주세요."

조카들도 커가고 있어서 나는 행여 학교에 다니지 못할까 내심 불안했었다. 가족들이 이젠 가지말고 함께 살자고 했지만 나는 다시 미군부대로 돌아갔다.

그렇게 미국꿈을 잊어갈 때인 1951년 봄에 느닷없이 파워스 상사가 부평으로 나를 찾아온 게 아닌가. 그것도 미국 사우스 캐롤라이나주에 있던 밥 존스 고등학교의 입학원서를 들고서…. 그리고 초가을엔 그 학교의 입학허가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막상 입학허가가 나오자 겁이 덜컥 났다. 영어도 못했지만 미국에 가면 언제 돌아 올지 걱정이 마구 밀려왔다.

나는 더듬거리며 핑계를 댔다.

"나는 키도 작고…, 영어도 못해요. 아마 어머니도 못 가게 할 거예요."

"영어는 배우면 되고, 너의 어머니껜 내가 허락을 받을게."

파워스상사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제 나도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의 진실이 느껴졌던 것이다. 파워스 상사는 5월 25일 입학허가서가 온 그 다음날 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나를 미국에 데려가기 위해 한국근무를 연장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파워스 상사는 통역자를 구해서 나와 함께 수원의 우리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내가 미군과 함께 들어오자 깜짝 놀라셨다. 어머니는 파워스 상사가 나를 미국으로 데려가기를 원하며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하는데 7년은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깊은 생각에 잠기셨다. 어머니의 나이 예순이었으니 이제 헤어지면 다시는 못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잠시 후 어머니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예, 장환이를 데려 가세요. 미국 선생님께 맡기겠어요. 미국 선생님 눈을 보니 믿음이 생깁니다."

그때까지 1년 가까운 하우스보이 생활을 통해 배운 것은 참으로 많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이라곤 찾기 힘들었는데 미군들은 전쟁터에서도 웃고 떠들었다. 그리고 미군들은 누가 보든 안보든 자신이 맡은 일에 열심이었다.

그런 그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정직과 근면, 명랑함을 내 삶의 좌표로 잡았다. 또한 소년 시절부터 일을 하면서 터득한 민첩함과 물건을 알뜰히 관리했던 습성은 훗날 교회 운영과 방송사 경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에게 가장 큰 감동을 안겨준 것은 역시 대가를 바라지 않는 파워스 상사의 정성이었다. 기회가 있을 때면 남을 돕겠다는 나의 철학은 그저 생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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