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17>제101話 우리 서로 섬기며 살자 16.YS와 김현철 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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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영삼 전대통령과의 첫 대면은 1980년에 이뤄졌다.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아 3김 중 누가 진짜 대통령감인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개신교 장로였던 김씨부터 상도동으로 찾았다. 김대중씨도 만날 생각이었는데 그만 정국이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김종필씨와는 70년대 초부터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1990년 서울에서 열렸던 제16차 세계침례교 총회때는 당시 민자당 대표였던 김영삼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동서 해빙 무드를 타고 유고·체코·폴란드·헝가리는 물론이고 쿠바와 소련의 대표단까지 참가해 대회를 빛내주었다. 그때 김씨는 대회 간부급 인사 1천5백명을 인터컨티넨탈 호텔로 불러 점심을 대접해주었다.

92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나는 마음 속으로 김영삼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신앙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그의 딸인 김혜경씨와 사위를 우리 방송사로 초대해 인터뷰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러자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방송사로 강력한 항의를 해왔다. 선거가 한참 남았는데도 아세아 방송(현 제주 극동방송)에서 방송이 나가자마자 방송국으로 항의가 빗발쳐 인터뷰 내용을 내보내려던 대전 극동방송은 계획을 취소해야 했다. 물론 서울에서도 나가지 못했다.

그 전해 나는 민자당 대표이던 김씨에게 오산 공군기지를 방문하라고 권유한 적이 있다. 군과 서먹서먹한 관계이니 우선 오산공군기지부터 방문해 친분을 쌓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던 포그먼 장군은 훗날 미국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나는 조용기 목사와 함께 자주 청와대를 방문했다. 아무래도 장로 대통령이니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친밀하게 지냈다.

야당지도자나 종교지도자를 만날 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무슨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면 김대통령은 기도를 부탁하기 위해 전화를 줬다.

나와 조용기 목사는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면 대통령에게 조언을 하기도 했다. 김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를 구속하라는 여론이 들끓던 97년 3월의 일이다. 그날 청와대 예배에서 나는 "반역을 꾀한 아들 압살롬이 진압군의 창에 찔려 죽은 후 다윗왕은 식음을 전폐하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나라를 잘 이끌어갔다"는 성경 대목을 인용해 우회적으로 결단을 촉구했다.

예배를 마치자 조목사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라며 망설였다. 그러자 김대통령이 "무슨 얘기인지 하시라"고 말했고 조목사는 이런 요지의 얘기를 했다.

"옛날 어느 왕국에서 밀농사가 풍년이 들었는데 한 무리의 탕아들이 말을 타고 와 밀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 나라의 왕은 다시 한번 이런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의 두 눈알을 빼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그런 일이 발생했는데 범인은 알고 보니 왕의 아들이었다. 왕은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으나 주변의 신하들이 반대했다. 왕은 고민 끝에 자신의 오른쪽 눈과 아들의 왼쪽 눈을 뽑았다." 이 얘기를 듣고 김대통령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날 청와대 오찬을 끝내고 곧바로 대전 국방대학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극동방송 비서실에서 연락이 왔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극동방송 비서실로 몰려왔던 것이다. 그날 우리가 김대통령과 나눈 대화에 대해 누군가가 슬쩍 흘렸던 것 같았다.

그날 조용기 목사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청와대에서 있었던 얘기를 했는데 그 자리를 김현기 중앙일보 기자가 지키고 있었다. 김기자는 1997년 3월 28일자 신문에 'YS, 고언듣고 장시간 기도. 조용기·김장환 목사 청와대 찾아 시국논의'라는 제목으로 그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마침내 5월 17일, 김현철씨는 구속되었다.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구속되어 수사를 받게 되자 시끄러웠던 정국이 어느 정도 진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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