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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낄낄낄… " 무공해 웃음 50년 이어온 童心의 얼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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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명랑만화는 사라졌는가.

따끈한 아랫목에 배 깔고 엎드려서, 혹은 떡볶이 냄새 가득한 대본소 의자에 기대 앉아 키득대며 읽어대던 '땡이'와 '꺼벙이', 그리고 '5학년 5반 삼총사'…. 주인공의 기발한 행동을 간결한 선 하나로 그려내 독자들을 포복절도하게 만든 1970년대의 명랑만화는 이제 만화잡지 안에서도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 많던 명랑만화는 어디로 갔을까. 월간 만화잡지 『웁스』의 박성식 편집장은 우선 80년대 중반 이후 주류를 형성한 사실적인 극화체 만화의 영향을 든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과 박봉성의 '신의 아들', 그리고 이재학의 무협물 등 극화체 만화들이 커다란 인기를 끌면서 자연히 간결한 코믹체의 명랑만화들은 입지가 줄게 됐다는 것. 여기에 '공작왕''북두신권''슬램덩크'등 사실주의풍 일본 만화들의 열기도 그런 경향을 부채질했다.

둘째로 80년대 중반 들어 명랑만화의 터전이던 『소년중앙』『새소년』『어깨동무』등 어린이 잡지들이 연달아 폐간되고 만화 전문잡지들이 늘어난 것을 꼽을 수 있다. 격주간 순정지 『윙크』의 오경은 기자는 "매번 웃기기가 힘든 명랑만화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쪽수가 적다"며 "잡지 지면 배정에서도 이런 만화는 쉬어가는 개념으로 자리잡게 됐다"고 설명한다. 지면의 감소는 작가의 수입에 영향을 주고 다시 작가 감소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명랑만화 속의 '웃음'은 어떻게 된 것일까. 80년대 중반 만화의 인기가 반짝 높아지면서 팬터지·학원물 등 다양한 장르가 등장했고, 고전적인 명랑만화의 웃음 역시 그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주됐다.

90년대를 뒤흔들었던 '슬램덩크'나 '열혈강호'를 보자. 주인공은 평상시엔 극화체의 멋진 모습이지만 웃음이 필요한 대목에서는 어김없이 이등신의 웃기는 캐릭터로 변신해 철저하게 망가진다. 진지함과 망가짐의 차이가 크고, 또 자연스러울수록 독자들의 호응도가 높아졌다.

세기말을 전후해 크게 달라진 사회상은 웃음의 내용도 바꿔놓았다. 대표적인 것이 '엽기'와 '패러디'다. 우선 엽기. "처절한 응징"을 외치며 등장한 김진태의 '대한민국 황대장'은 권위주의적인 사회를 전복하려는 의도를 기상천외한 행동으로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다.

에로틱한 상상력을 코믹한 분위기로 담아내 '명랑 포르노'라는 말을 유행시켰던 '누들누드'의 양영순도 따지고 보면 그 연장선상에 있다. '야 이노마'의 여성작가 김미영은 이름에서 성격이 짐작되는 여주인공 '광년이'를 통해 사회에 대한 조롱을 서슴지 않는다.

패러디의 인기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영화나 삼국지의 주요 장면을 이용해 사회성 짙은 유머를 구사하는 정훈이의 '영화vs만화' '트러블 삼국지', 광고를 뒤집어 새롭게 풍자하는 이철의 '왈딱 CF' 역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패러디는 기본적으로 패러디의 대상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만화의 창의성을 반감시킨다는 지적도 있다.

현재 정통 명랑만화의 맥은 어린 시절 추억을 그린 이빈의 '안녕 자두야'와 이우영의 '검정 고무신', 아기를 키우며 겪는 신세대 부모의 일상을 그린 홍승우의 '비빔툰', 만화가의 애환을 다룬 김나경의 '사각사각'정도에서 그 명맥을 찾을 수 있다. 또 직장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었던 김수정의 '날자 고도리'의 인기는 말썽꾼 무대리가 등장하는 강주배의 '용하다 용해'에 성공적으로 전수됐다고 볼 수 있다.

즐거운 웃음을 주는 국내 명랑만화의 효시는 "1920년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한 심산 노수현 화백의 '멍텅구리'"라고 한국만화문화연구원 손상익 원장은 말한다. 24년 영화로도 만들어져 크게 히트한 이 작품에서 명랑하면서도 엉뚱한 주인공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청강문화산업대 박인하 교수는 명랑만화의 특징으로 '일상성'을 든다. "개그만화나 코믹만화라 부르지 않고 명랑만화라 부르는 순간, 이 유구한 역사를 지닌 만화 장르는 '일상성의 발견'을 얘기하며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골에서 올라와 집을 찾느라 고생하는 할아버지를 돕는 꺼벙이의 고생담은 그 시절 우리의 모습이다.

그 때 그 웃음은 지금도 유효한 것일까. 지난해 5월 '두심이 표류기''도깨비 감투''달려라 하니'등 70~80년대의 대표적 명랑만화 7종을 복간한 바다출판사 김인호 사장은 "어릴적 재미있게 본 만화를 아이들에게 사주고 싶다는 30~40대 부모들의 문의가 많다"며 "특히 요즘 아이들도 이 만화들을 여전히 재미있어 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라고 말했다.

대중문화는 유행에 민감하다. 특히 혜성같이 등장한 '슈퍼스타'에 의해 장르 자체의 방향도 좌지우지되기 쉽다. 그러나 만화의 기본적인 덕목이 '웃음'이라고 할 때, 명랑만화는 여전히 우리 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고 있다. 즐거운 웃음이란 시대가 바뀌어도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아이들이 함께 보며 웃을 수 있는 만화. 그런 작품을 한두권쯤 소장하고 있는 것이 기쁨인 시절이 올 때, 만화도 진정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

정형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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