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하고 여유는 한껏 즐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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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7면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한 카드 회사의 광고 카피가 요즘 회자하고 있다.

왜 일까.

통계청의 조사 결과가 있다. 2000년 말 사회지표 중 한국인의 여가활용 형태에 관한 것이다. 이를 보면 TV시청이 41.2%로 단연 으뜸이다. 그 다음이 수면 및 가사 잡일로 29.5%였다. 우리의 70% 이상이 쉬는 날 집안에서 보낸다는 얘기다.

홍영규 미국변호사는 헝가리·미국 등 해외 여러 곳에서 근무 경험이 있다. 그는 "평일 서울의 대폿집에 외국인을 데려가 보면 한국의 역동성에 혀를 내두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일하는 날에는 세계 어느 민족에 비할 바 없이 한밤까지 온 몸을 바쳐 일하나 쉬는 날에는 집에서 잠을 자거나 TV를 보면서 지낸다는 말이 된다.

휴일을 왜 이렇게 보낼까. 통계청의 조사 결과 39.2%가 경제적 부담 때문이라고 했다. 또 29.8%가 시간 부족 때문이라고 답했다. 돈도 없고 시간도 모자라 이른바 '방콕'생활을 한다는 얘기다. 우리의 삶의 질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다. 앞서 말한 광고 카피는 이 같은 우리 삶의 수준을 읽고 '좀 놀고 즐겨라.(그러면서 카드도 사용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구정 한 중소도시에 귀향한 서울의 대기업 간부가 들려주는 얘기. 그는 고향에서 고교교사를 하는 동창생과 술 한잔을 기울이며 입씨름을 벌였다."매달 월급 잘 나오고 차로 30분이면 지리산·남해 바다가 나오니 얼마나 여유롭고 좋으냐. 어릴 때부터 공부는 열심히 해 일류대·일류 기업에 갔으나 40대 삶의 질은 서울 사는 내가 훨씬 떨어진다". 그의 말이었다."그래도 우리는 촌놈이다. 돈은 서울에 다 있다. 권력도 거기서 나온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 했다". 교사의 응대다.

"월급은 내가 조금 더 받으나 물가는 비싸 구매력은 더 떨어진다. 부와 권력을 잡은 사람은 서울의 소수다."고 되받자 그 교사는 말꼬리를 흐렸다는 것이다.

동남아나 베트남, 러시아 등지를 자주 다녀온 사람들도 "돈 좀 있다는 우리의 삶의 질이 그들보다 나은지 의구심이 든다"는 말을 자주 한다.

1970년대 시작된 공업화·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우리는 오직 앞만 보고 내달려온 탓에 삶의 여유를 팽개친 게 아닐까. 외국인들의 눈에 '빨리 빨리, 일벌레'로 내비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올 들어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지난달 31일 오후 1시쯤 서울 지하철 3호선 학여울역. 전동차의 문이 열리자 수십 명이 한꺼번에 몰려 나와 인근 전원주택 전시회가 열리는 전시장으로 빨려 들어갔다. 동료와 함께 구경키로 한 것인지 휴대폰으로 만날 장소를 확인하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다. 이 전시회에는 수만 명이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뿐만 아니라 올들어 여성 등산인구가 급증해 여성등산화가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갑갑한 도회에서 벗어나 여유롭고 높은 삶의 질을 찾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곧 실시될 주 5일 근무제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실시를 앞두고 노사간에 마찰이 있다. 하지만 정부는 공공기관부터 상반기 시행한다는 목표로 부처간 조율에 나서고 있어 그 실시는 눈앞에 다가왔다.

주 5일 근무제는 우선 여가시간을 늘려준다.1주에 2박3일의 휴가를 주는 셈이다.'시간이 없어 못 논다'는 사람은 이제 유구무언일 것이다.1박2일의 휴식과 2박3일의 휴식은 다르다.1박2일은 하루 반을 놀면서도 사실은 하루를 제대로 쉬지 못하는 휴일이다. 반공일은 집에서 보내고 일요일 나가보려고 하면 가고 오는데 몇 시간씩이다. 제대로 쉬는 시간은 몇 시간이 채 안된다. 그러나 2박3일의 휴식은 기실 2일을 쉬는 것이지만 감성과 시간상으로는 3일을 쉬는 효과가 있다.

일할 때는 '팍', 쉴 때는 '푹' 이라는 새 삶의 양식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현대그룹의 한 임원은 "일하는 즐거움 못지 않게 잘 노는 법이 중요한 시절이 오고 있다"고 규정한다.1주에 3일의 휴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지혜도 짜내야 할 때다. 돈 없어 못 논다고 '돈 타령'만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J섹션 조용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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