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좌파에 대한 모독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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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손호철(孫浩哲)교수의 4월6일자 시론, '색깔론 제대로 알고 하자'는 철저히 잘못된 사실인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이를 바로잡고자 반론을 제기한다.

孫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경제정책이 신자유주의를 따랐다고 이해하고서 현 정부를 좌파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에 반대해온 진보세력의 입장에서는 '좌파에 대한 모독'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적용에 무리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은 신자유주의에 기초하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경제구조개혁은 말로만 신자유주의적 시장경제를 주창하였지 실제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해 온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경제학자들 사이에서는 이 점에 대해서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을 정도다.

특히 정부가 주도해 시행한 빅딜정책은 신자유주의에 위배되는 관치경제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孫교수의 구분을 따르더라도 빅딜정책은 정부의 주도 아래 반시장적(反市場的)으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좌파적인 셈이다. 세상에 어떤 정부가 사기업이 영위하는 사업에 대해 직접적으로 간여해 사업분야를 결정하며, 이러한 결정을 따르지 않는 기업에는 자금을 회수하겠다는 협박을 가한다는 말인가?

孫교수는 국민의 빈부격차가 확대된 현상을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이 또한 엄청난 논리의 비약이다. 지금 빈부격차가 확대된 이유는 IMF관리체제 이후의 경기불황 시기에 저기술·저학력 근로자들이 직접적으로 소득감소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한 IMF관리체제 이후의 초고금리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시행된 부동산 경기활성화 정책 및 주식시장 부양정책이 빈부격차를 확대시킨 주요인들이다. 이러한 요인들을 무시한 채 빈부격차 확대가 곧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는 주장은 엄밀한 학문적 분석을 결여한 논리적 비약에 불과하다. 또한 신자유주의적 정책의 대표적인 예로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예로 들고 있으나 김대중 정부가 금과옥조처럼 자랑하는 노사정위원회 방식이 신자유주의적 정책과는 전혀 관계없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孫교수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 분석 없이 제목만 보고서 정책의 성격을 규정하는 무모함을 보여 주었다. 특히 수많은 정책을 신자유주의냐 아니냐의 틀에 맞추고자 억지를 부리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신자유주의는 강자의 논리만을 대변하고, 신자유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약자를 보호하는 온정적인 것이라는 구분방식도 다분히 흑백논리다. 그리고 모든 정책을 좌와 우 그리고 진보와 보수와 같은 이분법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는 정책을 제대로 평가하는데 혼란을 가져오기도 한다. 즉, 정책성향을 이념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정책수단의 실효성을 분석하는 것을 잘 구분해야 진정한 정책평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념과 정책수단 간에 혼란을 야기한 생산적 복지의 예를 들어보자. 생산적 복지는 孫교수의 구분대로 하면 우파적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생산적 복지가 비판받는 것은 비생산적이고 실효성이 없는 정책수단을 써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김대중 정부는 생산적 복지라는 이념을 말하면서 사용하는 정책수단은 이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비판받고 있는 것이지 생산적 복지라는 이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시대에 맞는 이념 검증을

이념은 중요하다. 그리고 최근 부각되고 있는 이념논쟁도 필요하다. 이념은 각종 정책의 목적과 방향을 결정짓는 주춧돌이기 때문이다. 시대적 상황에 맞지 않는 이념으로 설정된 정책방향을 갖고는 아무리 좋은 개별 정책수단을 개발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누가 어떤 이념을 갖고 있고 이를 어떻게 구체화하는가를 점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는 대권주자 검증방법이다.

돈 들지 않고 깨끗하며 정책대결이 중심이 되는 그런 선거는 제대로 된 이념논쟁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올바른 사실인식에 근거해 소모적이지 않고 생산적으로 진행되는 이념논쟁을 통해 이 시대에 가장 적합한 지도자를 검색하는 과정을 기대해 본다(이 글은 본지 4월 6일자 손호철 교수의 '색깔론 제대로 알고 하자'에 대한 반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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