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부석사 아미타불 眼光의 깊은 울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8면

오랜만에 찾은 부석사의 느낌은 20년 만에 다시 찾은 옛 하숙집 주인이 더 젊어져 있는 그런 당혹감이었으나 새 단장을 해도 명찰(名刹)은 역시 명찰이었다. 근래에 나는 서너 번 부석사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내 드라이브 코스의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다. 오가며 들르는 단양·문경·풍기 등의 지명이 새로웠고 유명한 그곳 사과를 사오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직까지는 신선한 이 오지의 풍광도 머지않아 도로 공사의 먼지가 걷히면 추억거리로나 남을 것이다.

하루는 부석사에 다녀온 다음,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잠못이루게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무엇일까. 봄밤에 애절하게 우는 소쩍새 소린가? 무량수전의 조형미(造形美)인가? 의상대사와 선묘 아가씨의 로맨스, 신라시대의 불교적 신파(新派)는 아닐 것이고…. 한참을 헤매다 부석사에서 나를 잠못이루게 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무량수전의 아미타불의 눈. 바로 그 눈이 내뿜는 눈빛이었다. 무량수전의 불전은 건물의 정면에서 90도 각도로 꺾어져 돌아앉아 있는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어, 왕을 알현하러 강녕전에 들어가듯이 앞에 가서 마주보기 전에는 측면을 보게 되어 있다.

깊고 가파른 소백산맥의 급경사를 힘겹게 올라가 경내에 들어서면 으레 있게 마련인 석탑 대신에 소박한 석등 하나, 신라시대의 명품이다. 곧바로 무량수전, 열린 문 속에 아미타불이 옆으로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밝지 않은 법당으로 들어서면 아미타불이 천근의 무게로 압도해온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이번에는 천파만파로 펼쳐진 능선의 해일을 배경으로 다시 바라보는 측면. 할 말을 잊게 하고 숨이 탁 멎을 듯하다.

몽고나 왜구의 침탈 속에서 외래 색을 지우고 우리 고유의 것을 세우려는 고려의 노력은 필사적이었을 것이다. 부석사 아미타불에서 나를 그토록 사로잡던 것은 여태까지 내가 보아온 불상 중에서 가장 토착화된 순수한 우리 모습이었다. 무량수전의 북쪽 벽에서 바라볼 때 희미한 역광이 걷히면 드러나는 우리 청년의 말끔한 모습이 주는 우주적인 멋. 다른 모든 불상이 보여주는 인도나 서역 또는 중국의 강렬한 이국풍의 이질감이 아미타불에는 없다. 처음부터 측면에서 보게 할 의도로 앞으로 숙인 상체에서 코를 훨씬 높게 세우고 안면을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긴 목, 아주 짧은 인중, 젊은이의 풀어진 듯한 두툼한 입, 윗입술은 약간 치켜 올라갔고 두 입술이 만나는 선과 평행하게 도식화된 검은 선으로 수염을 처리했다. 아주 파격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뇌성벽력 같은 공간의 울림이 전해 온다. 눈이다. 안광이다. 건축 공간이 만드는 자연 간접조명이 이 절묘한 의도를 가능하게 한다. 다만 머리를 숙일 뿐이다. 다시 바라보는 눈. 그토록 나를 사로잡는 눈은 관념의 불꽃을 겨냥하고 있다. 그 눈은 보는 눈이 아니라 불꽃의 소리를 듣고 있는 명상의 눈이다. 이 소조(塑造) 불상의 아름다운 힘은 목조건물 전체를 날려버릴 듯한 기세로 천둥 번개를 깔고 앉아 있어서 소백산 자락 사방 수백리를 압도하고 있다. 이보다 더 성공한 종교적 조각이 있을 수 있을까? 7백년이 넘는 세월을 견디어 남아 지금 우리 앞에서 이렇게도 당당하게 조형의 아름다움과 조화의 힘을 보여 주고 있는 얼굴의 표정. 창조는 하늘의 힘이다. 인간의 소임은 다만 사랑하는 것이다.

<화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