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세계 경제위기와 극복의 지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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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하지만 미국 컬럼비아대의 로버트 팰런(전 외환은행장) 교수는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한국도 이 일곱 가지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에 비교적 잘하는 것 같다. 한발 더 나아가 한국인들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할 줄 아는 국민성도 지니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미래는 밝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 시대에 대해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일곱 가지 지혜라는 기준으로 볼 때 여전히 미국이 가장 좋은 점수를 받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리스의 국영 해운·통신회사 등의 인수를 위해 중국 관리들이 최근 아테네를 방문했다는 보도를 보면서 기시감(旣視感)을 느꼈다. 역사는 반복돼서, 어떤 현상을 목격하면 과거의 경험 때문에 그 다음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쉽게 예견된다. 25여 년 전에 동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경제가 파탄 났다. 이 나라들은 모라토리엄(외채상환 동결)을 선언하고 ‘배째라’ 식의 원금 탕감도 받아냈다. 당시 이들 국가의 알짜배기 국영기업체들이 일본을 포함한 외국 기업과 채권단 은행들에 매각됐다. 필자가 당시 미국은행 뉴욕본사의 대출금 출자전환 태스크포스 요원으로 근무하면서 아르헨티나의 국영통신회사 엔텔의 민영화 경쟁입찰에 관여할 때의 경험이다. 이들 국가는 필사의 노력을 경주해 1990년대 초반부터 다시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필자의 팀은 아르헨티나에 빌려준 대출금 대신에 엔텔의 주식을 취득했는데, 수년 후에 통신기업 주식의 호황으로 빌려주었던 원금의 몇 배를 회수했다. 역사적으로 경제가 파탄 난 나라들의 마지막 수단은 원금 탕감을 요청하거나, 아니면 알짜배기 국영자산과 문화자산을 매각하는 패턴을 반복해 온 것이다.

이번 세계 경제위기는 단기간에 끝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상적인 경제성장의 궤도로 들어서기까지는 수년이 더 걸릴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경제주체인 국가와 국민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승자와 패자가 판가름나게 될 것은 분명하다. 미국의 경우 창의성, 투명성, 실용적 개혁성뿐 아니라 글로벌 위기 때마다 일어나는 달러 사재기 현상에 힘입어 달러의 지위가 다시 한번 확인됐다. 다른 나라보다 더 유리한 입장이다. 게다가 최대의 약점인 재정적자 해소를 위한 정책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있다. 최근 『흔들리는 지구의 축』이라는 베스트셀러를 낸 파리드 자카라이아가 제시한 미국 재정적자 해소정책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연 10만 달러 이하의 소득자에겐 완전면세를 하는 등 소득세율을 대폭 인하하되, 세계적 추세인 부가가치세(VAT)를 도입하라”고 주문했다. 연간 수천억 달러의 재정적자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경제의 근본적인 체질을 뜯어고치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있다.

한국·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와 중남미의 신흥공업국가들은 그런대로 견실한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남은 곳이 유럽이다. 앞으로 세계경제의 순항은 유럽연합에 많이 달려 있는 게 사실이다.

유럽연합은 유로화의 급격한 평가절하에 힘입어 국제경쟁력이 제고되고, 무역수지와 무역외수지가 개선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유럽연합의 조속한 회복을 위해서는 기본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수백 년간 세계를 이끌어온 강점을 되찾는 게 관건이다. 그 핵심은 ‘서양지혜의 일곱 기둥’에 다시 한번 충실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김수룡 도이치은행그룹 한국회장 겸 한국대표 미 공군협회 미그앨리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