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나의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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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용기를 냈다. 좀처럼 가보지 않았던 영역에 용감하게

돌진했다." 지난 주말 개봉한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한 박찬욱(39) 감독의 연출변이다.

그런데 가보지 않았던 영역이란 무엇일까.

박감독은 "쉬어가는 장면이 없게 밀어붙였다.

시종일관 한눈을 팔지 않도록 했다.

황당하고 상투적인 요소도 많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엉뚱한 것을 강조했고,

또 애용했다"고 설명했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었을 법하다. 특히 후반에 연달아 등장하는 잔혹한 살인 장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수 있다. 신부전증을 앓는 누나의 수술비를 위해 어린애를 유괴한 청각 장애인 류(신하균)와 무정부 혁명주의자 영미(배두나)에 대한 아이 아버지 동진(송강호)의 복수극이 치가 떨릴 만큼 비정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화가 듬성듬성 건너뛰는 인상을 준다는 것이다. 물 흐르는 듯한 자연스런 인과관계를 생략하고, 사건 사건을 뚝뚝 끊어 제시한다. 비약이 심하다 해도 무방하다.

"많은 영화들이 기피하는 우연적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하지만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각 장면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나중에 삽입했을 뿐이다. 다만 세계는 분명 논리적으로 해명되는 질서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복수는 나의 것'은 처절하다. 아니 서글프다. 아이를 죽일 뜻이 전혀 없었던 '착한' 성품의 류와 영미, 그리고 딸을 유괴 당한 고졸 출신의 중소 기업인 동진 등 주요 등장인물이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처단되는 비극적 설정이 마음을 짓누른다.

박감독을 '스타 연출가'로 자리 매김한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의 따뜻한 위트 대신 이번에 그는 엉뚱하기 짝이 없는 썰렁한 유머로 작품을 끌고간다. 그는 선의(善意)로 시작한 행동도 선하게 끝날 수 없는 게 인간사의 아이러니라고 덧붙였다.

"결정적 운명론이 아니다. 하지만 내 경험과 판단으론 세상 일에는 자기 힘으로 안되는 게 많다. 적어도 우리는 우연과 운명 같은 것에 휩쓸리는 것 같다."

그가 재미난 비유를 했다.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1992년)과 '삼인조'(97년)의 잇따른 참패로 '퇴출'당할 뻔했던 그가 'JSA'로 재기할 줄 누가 알았겠느냐는 것,'JSA' 개봉 전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이란 돌출 변수로 '대박'을 터뜨렸다는 것, 그 결과 신작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김씨(김대중 대통령·김정일 국방위원장)가 저를 이렇게 바꿔놓았네요."(웃음)

혹시라도 'JSA'의 성공으로 따라붙은 '흥행 감독'이란 꼬리표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 사실 그는 감독 중에서도 소문난 영화광이자, 소위 주류적 감성을 거부하는 'B급' 성향의 영화를 선호하는 것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전혀 아니다. 차기작으로 'JSA'와 유사한 분위기를 구상하고 있다. 다만 비슷한 종류의 영화를 연달아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지겹고 싫증나는 일이다. 그렇다고 작품마다 스타일이 다른 나를 '작가'로 불러서는 곤란하다. 또 쟁쟁한 스타들을 기용했다는 점에서 결코 B급 영화로 부를 수 없다. 색깔이 다른 상업 영화일 뿐이다."

그가 '하드 보일드'(건조하고 비정한 어법)라고 규정한 이번 영화에선 만사가 절망스럽다. 희망의 싹이라곤 전혀 찾을 수 없다. 영화에서 기대하는 관객의 소박한 소망을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다.

"유쾌하진 않지만 그게 보다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몰라도 나에게 영화를 만드는 추진력은 세상에 대한 분노다. 그것이 한국 사회든, 아니면 전지구의 자본화든 말이다. 체제에 함몰된 개인의 미약함을 주시했다. 그래서 카오스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영화는 정돈돼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그는 살인 장면이 지나치게 잔혹하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반박했다.'텔미 썸딩''피도 눈물도 없이''공공의 적'은 어땠냐는 것.

동진이 류의 아킬레스건을 자르는 장면도 이미 '게임의 법칙'에서 나왔다고 적시했다.

"묘사가 잔인하기보다 행동·사건들이 망설임 없이 단호하게 이뤄지는 까닭에 그런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그것도 대낮 탁 트인 곳에서 일어났으니. 잔인보다 무자비하다는 표현이 옳다."

박감독은 이번 영화를 악몽에 견주었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섬뜩한 장면만은 뇌리에 박히는 흉흉한 꿈처럼 특정 순간의 충격과 이미지를 극대화했다고 설명했다. 그게 비록 부조리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배우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클로즈 업하고, 살인 장면과 식사 장면 등을 교차시켰다고 했다.

그래도 비정한 화면과 썰렁한 유머 사이에 엇박자가 느껴진다고 하자 "그게 새롭지 않은가. 쉽게 만들었으면 절대 재미도 없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재연하는 '구닥다리' 리얼리즘 대신 초현실적 느낌이 감도는 현실, 즉 시·공간이 모호하면서도 '바로 여기' 같은 인상을 주는 그런 종류의 리얼리즘을 지향했다고 강조했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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