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제2부 薔薇戰爭 제2장 揚州夢記 : 이사도 목을 벤 장보고와 정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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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이 때 평로치청군의 대장은 유오(劉悟)로 이 사람 또한 계략이 뛰어났던 장수였다. 왕지흥이 용장이라면 유원은 지장이었는데, 왕지흥은 유오의 지략에 빠져 삽시간에 협곡에서 포위가 되고 말았다. 이 때 나서서 왕지흥을 구한 병사가 바로 장보고와 정년이었다.

장보고와 정년은 대총관 왕지흥 양옆에서 호위하면서 달려드는 적들을 베고 혈로를 뚫어 간신히 포위망을 뚫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때의 혈투가 얼마나 강렬하였는지 온몸에 핏물을 뒤집어 쓴 듯 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을 정도였다. 만약에 장보고와 정년이 아니었더라면 왕지흥은 적들에게 사로잡혀 무참히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보고와 정년은 생명의 은인이 된 것이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왕지흥은 장보고와 정년에게 총관의 직책을 수여하려 하였다. 총관이라면 군사 5천명을 거느릴 수 있는 진장이었으나 많은 군장들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어쨌든 장보고와 정년은 신라사람이 아니나이까. 동이족에게 총관의 지위를 주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하나이다."

총관은 도독(都督)으로 군사가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계급이었다. 또한 장보고와 정년은 병사 5백명을 거느릴 수 있는 압관이었으므로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한꺼번에 두 계급을 특진하여 총관에 오를 수는 없음이었던 것이다.

절충안으로 장보고와 정년에게는 군사 1천명을 거느릴 수 있는 자총관(子總官)의 계급이 수여되었다. 두목이 『번천문집』에서 기록하였던 대로 마침내 자총관, 즉 군중소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왕지흥은 장보고와 정년에게 언젠가는 총관의 계급을 수여할 것임을 약속하였다.

얼마 후 이사도의 평로치청군과 왕지흥의 무령군은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 시작하는데 이때 장보고와 정년의 활약상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두목이 청주에서 무릎을 베고 누워 두구화로부터 들었던 '소저는 잘 모르지만 지난번 번진의 난 때 특별한 무공을 세운 천하의 영웅이라고 들었나이다'라는 말처럼 장보고와 정년의 무공은 가위 천하의 영웅이라고 부를 만하였던 것이다. 두구화는 또한 '활을 쏘아 이사도를 말에서 떨어뜨린 사람은 장보고였고, 말을 타고 달려 들어가 이사도의 목을 먼저 벤 사람은 정년이어서 절도사 나으리도 두 사람 중 누구의 무공이 뛰어났다고 감히 판단하지 못하여 두 사람 모두를 함께 군중소장으로 진급시켰다고 전해오고 있나이다'하고 말하였지만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는 이사도의 목을 벤 사람이 평로치청의 군장이었던 유오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오는 장보고의 군사로부터 궁지에 몰리게 되자 반란을 일으켜 번진 이사도의 목을 베고 관군에 투항하였다고 『자치통감』은 기록하고 있으나, 또 한편으로는 유오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자 이사도는 아들 홍방(弘方)과 함께 산 속으로 도망쳤는데, 숨어있던 이사도를 발견하여 활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린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고, 시위하는 군사들을 무찌르고 달려들어 이사도의 목을 베었던 것은 정년이라는 소문 역시 파다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양주의 기녀들은 장보고와 정년이 이사도 부자의 목을 베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두 사람을 천하의 영웅으로 노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어느 것이 역사적 사실이든 이로써 4대에 걸쳐 55년간이나 오늘날의 산동반도 전역과 강소의 일부를 점유하고 독립적 소왕국으로 군림하던 평로치청 군진은 완전히 토벌되었던 것이다.

원화 14년 기해년(己亥年·819) 가을이었다.

두목은 『번천문집』에서 이 때 장보고의 나이를 '30세'라고 못박음으로써 불확실한 장보고의 생애에 분기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때 두목의 나이는 17세로 그렇게 보면 장보고는 두목보다 불과 13세의 연상인 동년배이자 동시대사람이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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