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눈치 못채게 날렵하게 판 제압 '조제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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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바둑판 3백61로는 안개 자욱한 험로이자 도처에 함정이 도사린 미로(迷路)이기도 하다. 1970년대 한국 바둑의 신성으로 등장한 조훈현9단은 전에 본 적이 없는 눈부신 속도의 행마법으로 판을 누비더니 곧 모든 타이틀을 휩쓸어버렸다. 조훈현은 한마리의 새가 허공을 날듯이 빠르고 가볍게 움직였다.

그 새는 날개를 퍼덕이지도 않았고 깃털을 세우지도 않았기에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기 힘들었다. 다만 바람을 따라 소리없이 움직였기에 마음먹고 큰 칼을 휘둘러봐야 헛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제비'라고 부르게 됐다.

조훈현은 겉보기엔 피를 원치 않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빠르게 판을 헤집고 다니다가 상대가 화를 내면 물찬 제비처럼 물러섰다. 조훈현은 당시 살집이 없는 날씬한 청년이었다. 평소의 걸음걸이도 어찌나 빠른지 따라가기 힘들 정도여서 제비란 별명은 잘 어울렸다. 그러나 이 '제비'는 조9단이 없는 자리에선 '조제비'로 변하곤 했다. '조제비'라는 표현은 제비족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다. 동료나 선배 프로들은 그가 없는 데서 '조제비'라 지칭하며 매끄럽고 빨라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조훈현에 대해 원망과 질시를 토해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빠른 조훈현도 이창호9단이나 유창혁9단 같은 강적이 등장하면서 덜미를 잡히게 됐다. 조훈현이 과속차량이라면 이창호는 그 과속차량을 끝까지 추적하여 어김없이 딱지를 떼는 교통순경이었다.

조9단은 90년대 후반 전투적인 스타일로 과감하게 변신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이기는 시절은 끝났다는 것을 안 것이다. 조9단은 요즘엔 하도 싸워 '화염방사기' 또는 '전신(戰神)'이라 불리는데 이같은 변신을 통해 그는 나이 50을 바라보는 지금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가고 있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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