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의 디바 이 은 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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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무대에선 늘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무대를 내려와선 다시 내일을 착실하게 준비하는 가수, 그녀가 이은미다.

1988년부터 다운타운에서 노래를 했다니 무대 경력은 이미 15년차다. 그러나 방송에 출연한 횟수는 연륜에 비해 매우 적다. 그녀가 프로그램을 가린 탓도 없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방송이 그녀를 부르지 않았던 게 더 큰 이유다.

그녀가 '지하'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 지상(기성방송)에선 김완선이라는 가수가 귀여운 몸짓으로 대중의 눈을 즐겁게 하고 있었다.

정성껏 녹음해 무려 열네군데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지만 당사자인 이은미를 만나서는 고개를 젓기 일쑤였다. "이 얼굴에, 게다가 춤도 못 추는데 누가 날 부르겠어요?" 살아남은 자는 지금 웃으며 아픈 '기억 속으로' 진입한다.

여유마저 감지되는 지금의 추억담이야말로 오늘 밤도 언더그라운드에서 '실력을 쌓으며 열심히 노래하면 언젠가 대중이 알아준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희망의 증거다.

"잠을 깨고 세상과 마주할 때마다 늘 감사함을 느끼죠." 햇살 아래의 그녀에게서 무대를 파괴할 듯하던 광분의 흔적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저 온화하고 순박할 뿐이다. 그녀는 무엇이 고마운 걸까.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무대에서 아직 밀려나지 않은 것. 돌아보면 맨 감사할 일이죠."

본인은 쑥스러워하지만 무대 위에서 그녀의 작위(爵位)는 '맨발의 디바'다. 맨발은 그녀에게 자유로움의 표상이다. 맨발은 욕심을 버리게 하고 떠나간 자유, 자연을 다시 불러들이는 힘을 되돌려 준다. 제사장인 그녀 앞에서 관객은 여지없이 즐거운 포로가 된다. 그녀는 대중을 파악하고, 드디어 장악하고, 마침내 함락시킨다.

그러나 지금 마녀는 뜻밖의 말을 한다. "실은 무대 밖이 더 행복해요. 무대 위에서 만족해하는 건 교만이니까요." 무대를 무서워할 줄 아는 그녀에게서 프로의 냄새가 난다.

지난해 그녀는 엉뚱하게도 시사고발 프로에 등장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사건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니라 사건의 증언자, 혹은 진단자로 그녀는 담담하게 자신의 가치관을 피력했다. 발언의 요지는 단순 명료하다. 가수는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그녀의 말이 세간에 화제가 된 것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도 무대를 휘젓는 가수가 너무 많다는 사실 때문이다. 투명하지 않은 가요의 유통경로와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시한부 가수들. 가요계의 전사(戰士)는 그것을 '비틀린 음악 현실'이라고 요약했다.

그녀는 유난히 '길'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선배의 길이 있으므로 내가 그 길로 가고 내가 가는 길을 후배들이 다시 밟게 되잖아요." 다시 15년 후에 뒤돌아볼 이은미의 길이 어떤 지도를 만들어 놓을지 궁금하다.

그녀는 단독 공연 5백회 기념 콘서트를 준비 중이다. 5월 말에 마침 펜싱 경기장에서 열린다니 그녀와 관객이 벌일 한바탕 칼싸움이 볼 만할 것 같다.

사진=신인섭 기자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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