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향민 작가의 '원초적 悲願' 모성을 향한 끝없는 갈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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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숲속이나 들판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황토색의 나부(婦).

풍만한 가슴과 기이하게 커다란 얼굴. 자세는 관능적이지만 왜곡된 인체의 비례와 평범한 용모 때문에 선정적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여인. 영원한 모성과 토속적인 평화로움을 느끼게 하는 나부는 고 최영림(崔榮林ㆍ1916~85)화백의 트레이드 마크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 센터는 오는 15일~4월 7일 최화백의 작품세계 전반을 살펴보는 대규모 유작전을 연다. 고인의 유작전은 그동안 세차례 열렸지만 유채와 흙가루로 표현한 1970~80년대의 대표작 위주로 알려져 왔다.

이번 기획전은 50년대의 유화를 포함, 다양한 기법으로 제작된 미공개작들을 대거 접할 수 있는 포괄적인 전시라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유화와 목판화를 비롯한 드로잉·은지화·스티로폼화 등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제작된 작품 1백10점이 센터 전관을 모두 채운다.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기본적인 화두는 망향이다.

평양 출신인 최화백은 일본 도쿄 태평양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평양 숭의여중 미술교사로 재직하다 50년 한국전쟁 중에 월남했다. 고향에 남겨둔 처자식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작품세계에 평생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50년대의 초기작들은 '흑색시대'로 분류된다. 전쟁의 비극과 이산의 고통은 검은 선을 굵고 거칠게 그려넣은 반추상화로 나타난다.

43세 되던 59년에 재혼한 그의 화풍은 이후 '황색시대'로 바뀐다. 심청전이나 장화홍련전 같은 전래 설화를 소재로 에로틱한 여체와 동물이 어우러진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것. 모래와 흙을 캔버스 표면에 바른 그의 유화는 독특한 질감으로 유명하다.

고가(古家)의 오래된 흙벽에서 구한 황토를 빻아 캔버스에 곱게 바른 뒤에 유채를 그렸다.

고인은 자신의 나부에 대해 "내 그림에는 미인도랄 게 없다. 개수(改修)를 기다리는 듯 붉은 살을 드러낸 토담에서 나는 새로운 생명의 잉태를 본다"고 설명했었다.

설화와 황토를 이용한 나부상은 절정기로 평가받는 70~80년대 작품에서도 유지된다.

윤범모 경원대 교수는 그의 나부상에 대해 "영원한 모성에의 예찬이자 고향회귀 의식의 발로"라며 "토속의 세계를 넘어 분단시대의 평화, 상처없는 여체로서 청정무구한 세계를 상징화한 것"이라고 풀이했다.

일본에서 본격적인 목판화 수업을 받았던 그는 한국 최초의 판화단체인'한국 판화협회'를 결성할 정도로 판화에 애착이 컸다.

국전 운영위원·중앙대 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85년 후두암으로 타계했다.

특별전시장에선 유품 2백여점도 전시해 고인의 인간적인 숨결을 느낄 수 있게 했다. 화구와 유품으로 연출한 아틀리에와 표주박·찻잔·도장·벼루·의복 등이 나온다.

서울 전시 후에는 최영림이 한때 살았던 부산에서 순회전(4월 19일~5월 5일ㆍ코리아아트 갤러리)도 열린다. 02-3217-0233.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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