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산업 밑거름 대중문학 꽃피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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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근래 나온 책 중 눈에 번쩍 띄는 두 권이 기자의 책상 앞에 있다. 국내 출판계와 문학동네가 스쳐 보낼 게 분명한 책,그러나 실은 시대변화를 알리는 천둥소리로 들어야 할 텍스트로 판단되는 책들이다. 문제의 책은 『유혹하는 글쓰기』(스티븐 킹 지음, 김영사) 『버스, 정류장』(심재명 등 지음, 명필름). 이중 문학 창작론인 스티븐 킹의 책은 창작과 글쓰기의 실제에 관한 독자적 노하우를 담았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다. 놀라울 정도로 잘 쓰여졌다. 고수(高手)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목소리, 그걸 유머감각을 곁들여 척척 짚어낸다.

문학을 '거룩한 그 무엇'으로 전제하지 않는 쿨한 태도, 그러면서도 "글쓰기란 정신적 감응"이라고 선언하는 당당함은 거물 작가답다 싶은데, 놀라운 것은 따로 있다. 다름 아닌 대중작가가 이처럼 유용하고, 또 탁월하기까지 한 창작론을 써냈다는 점이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의 변화된 문학을 상징한다. 사실 스티븐 킹은 존 그리샴·톰 크랜시 등과 함께 펴냈다 하면 수천만부까지 팔아치우는 초대형 작가다. 또 할리우드 영화산업에 원자재를 공급해주는 '문학 공장'이다. 추리·멜로·호러·팬터지 등 대중문학은 독서시장의 '효자'지만, 이토록 복합적 역할을 맡는다.

문제는 한국이다. 아직도 엄숙주의에 사로잡힌 국내 문학은 시장 장악의 힘을 잃었고, 문학의 위엄마저 상실했지만, 이렇다 할 돌파구가 없이 흘러가는 형국이다. 이때 작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야 할 게 『버스, 정류장』일 것이다. 최근 개봉한 같은 제목 영화의 컨셉트 북이자, 별도의 에세이집으로 나온 이 책야말로 시대 변화를 말해준다. 문학의 파생 상품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거꾸로 된 것이다. 영화판은 이제 문학에 기대지 않고 자체 힘으로 출판 겸업까지 한 셈일까.

어쨌거나 지금이 중요하다. 항용 연극·영화의 원자재 공급이야말로 문학의 몫이라고 하지만, '과연 어떻게'가 문제다. 우선 대중문학의 꽃부터 왕창 피워내야 한다. 따라서 10년 전 소설가 양귀자가 '탈출'에 성공했듯 정통이라는 명분에 매달릴 필요없이 '한국의 톰 크랜시'로 개종하는 이들부터 등장해야 한다. 개종자들을 백안시하지 않는 분위기도 필수다. 기자가 듣자니 『가시고기』의 조창인, 『눈물꽃』의 김민기, 『돼지들』의 이정규 등 4~5명의 대중작가들은 몇 년 전부터 경기도 안성에서 합숙하며 윤독(輪讀)과 작품평가를 겸한 정례 모임을 연다고 한다. 평론가의 철저한 외면 속에서 자기부축을 하는 안쓰러운 형국이다.

이걸 바꿔줘야 한다. 해서 이런 아이디어는 어떨까 싶다. 작가를 키우고 평론가를 끌어들이기 위한 급선무이자 핵심 장치로 대중문학지를 창간하는 작업 말이다. 위험부담이 크다고? 그렇다면 창해, 생각의 나무, 은행나무, 자음과 모음, 밝은세상 등 관련 출판사의 공동출자 형태를 제의하고 싶다. 따로 놀면 '판'을 키울 수 없는 법이 아닌가. 1970년대 이후 김성종·이원호·임선영·홍재유·하병무·김진명·고원정 등으로 이어지는 장르문학의 계보와 작품에 대한 자리매김도 바로 이 공간에서 이뤄져야 한다. 재확인하지만, 대중문학·장르문학이 커지지 않고는 현재 반짝하는 영화산업도 길게 갈 수 없다.콘텐츠 난(難)때문이다.그렇다면 (대중)문학의 크기란 영상산업의 앞날과도 연결되는 급선무다.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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