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다수를 소수가 지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과거 소수 백인정권이 가혹한 흑백분리정책을 편 적이 있다. 하지만 인류의 공적으로 몰려 백인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그리고 히틀러의 광기처럼 교훈의 역사가 돼 사라졌다.
이제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는 건 스포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특히 축구 월드컵에서 그러하다. 14억 인구의 중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단 한 번 본선에 얼굴을 내밀었다. 한국과 일본에 짓눌리던 중국은 두 나라가 주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오른 덕에 입장권을 용케 거머쥐었다. 12억 인구의 인도 역시 월드컵이라면 축구 아닌 크리켓 경기부터 떠올리는 나라다. 베이징올림픽 때 28년 만에 금메달을 건졌다며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던 나라가 인도다. 인구 128만 명으로 월드컵 본선에 당당히 오른 카타르 같은 소국과 비교하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인구나 경제력이 축구 실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유수 금융사들이 때만 되면 내놓는 월드컵 승부 예측은 역대 성적과 선수 전력뿐 아니라 인구·경제력·주가 등 경제요인까지 골고루 고려한 것이다. 골드먼삭스와 UBS는 글로벌 위기에서 승승장구하는 브라질을 일찌감치 월드컵 우승국으로 점찍어 뒀다.
한국이 2대0으로 누른 그리스는 재정위기의 진원지다. 곳간을 거덜 내고 뒤룩뒤룩 살만 쪘다는 이른바 돼지들(PIGS: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의 대표주자다. 골드먼삭스가 계산한 월드컵 우승 확률은 한국이 0.76%, 그리스가 1.84%. 한국 승리가 이변(異變)이라면 이것도 이변인 이유다. 재정위기가 축구 실력을 갉아먹었는지 가릴 길은 없으나, 맥 풀린 선수들에게서 위기의 PIGS를 떠올리는 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허귀식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