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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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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변발은 영어로 ‘pigtail’이다. 남자 머리의 뒷부분만 남기고 나머지 부위를 깎아 뒤로 길게 땋아 늘어뜨린 모양이 ‘돼지 꼬리’와 닮아서일 것이다. 1644년 만주족이 베이징을 점령한 뒤 맨 먼저 한족에게 강요한 것이 바로 이 변발이었다. ‘머리카락을 남기고자 하면 머리를 남기지 말라’. 100만 명의 소수 만주족이 1억 명의 절대 다수 한족에게 강요했던 항복과 복종의 꼬리표였던 셈이다. 무자비한 탄압으로 한족의 기를 꺾어놓은 만주족은 1911년 신해혁명 때까지 광활한 제국을 경영한다.

오늘날 다수를 소수가 지배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도 과거 소수 백인정권이 가혹한 흑백분리정책을 편 적이 있다. 하지만 인류의 공적으로 몰려 백인정권은 국제적으로 고립됐다. 그리고 히틀러의 광기처럼 교훈의 역사가 돼 사라졌다.

이제 소수가 다수를 압도하는 건 스포츠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특히 축구 월드컵에서 그러하다. 14억 인구의 중국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단 한 번 본선에 얼굴을 내밀었다. 한국과 일본에 짓눌리던 중국은 두 나라가 주최국 자격으로 본선에 오른 덕에 입장권을 용케 거머쥐었다. 12억 인구의 인도 역시 월드컵이라면 축구 아닌 크리켓 경기부터 떠올리는 나라다. 베이징올림픽 때 28년 만에 금메달을 건졌다며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던 나라가 인도다. 인구 128만 명으로 월드컵 본선에 당당히 오른 카타르 같은 소국과 비교하면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그렇다고 인구나 경제력이 축구 실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유수 금융사들이 때만 되면 내놓는 월드컵 승부 예측은 역대 성적과 선수 전력뿐 아니라 인구·경제력·주가 등 경제요인까지 골고루 고려한 것이다. 골드먼삭스와 UBS는 글로벌 위기에서 승승장구하는 브라질을 일찌감치 월드컵 우승국으로 점찍어 뒀다.

한국이 2대0으로 누른 그리스는 재정위기의 진원지다. 곳간을 거덜 내고 뒤룩뒤룩 살만 쪘다는 이른바 돼지들(PIGS: 포르투갈·이탈리아·그리스·스페인)의 대표주자다. 골드먼삭스가 계산한 월드컵 우승 확률은 한국이 0.76%, 그리스가 1.84%. 한국 승리가 이변(異變)이라면 이것도 이변인 이유다. 재정위기가 축구 실력을 갉아먹었는지 가릴 길은 없으나, 맥 풀린 선수들에게서 위기의 PIGS를 떠올리는 건 인지상정(人之常情)일 것이다.

허귀식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