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현장 여과없이 중계, 상업성과 공익 경계 모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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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호 04면

미국의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 소재와 방식도 날로 진화를 거듭해, 지금까지 미국에서 제작된 리얼리티 쇼가 200여 종에 달한다는 통계도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리얼’을 표방하다 보니 구체적인 각본 없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예기치 않은 사고가 속출하기도 한다. 작게는 방송에 부적합한 장면이 연출되는 것에서 크게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위중한 것도 있다. 지난주 미국에서는 리얼리티 프로그램 촬영 도중 어린 소녀가 목숨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

김수경의 시시콜콜 미국문화 -TV 범죄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명암

문제의 프로그램은 미국의 케이블채널 A&E에서 방영 중인 ‘더 퍼스트 48(The First 48)’. 실제 경찰이 범죄자를 급습해 체포하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 프로그램이다. 사고가 있던 날 경찰은 소녀의 집 2층에 살고 있는 살인 용의자를 급습했다. 이 과정에서 소녀의 가족들과 경찰들 간에 몸싸움이 발생했고 한 경관의 총에서 우연히 실탄이 발사되면서 소녀가 사망하게 된 것이다.

미국에는 실제 경찰들의 활약상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매우 많은데, 이번 사건을 계기로 과연 경찰의 공무수행 과정을 TV에 방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의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반대하는 쪽에서는 “범죄 현장에 TV 카메라가 동행할 경우 경찰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과장된 대응을 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건에 연루된 디트로이트 경찰 측은 성명을 내고 “현장에 TV 카메라가 있었던 것은 급습이 행해진 방식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찬성하는 쪽에서는 “제3자가 지켜보고 있기 때문에 경찰은 훨씬 더 공정하고 적법하게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프로그램 취지 자체는 범죄에 대한 예방 및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이라고는 하나 TV 카메라의 존재는 경찰에게나 범죄자에게나 부담이기는 하다. 2006년 NBC에서 방영한 ‘투 캐치 어 프레데터(To Catch a Predator)’에서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 도중 범죄자가 자살을 하기도 했다. 미성년자와 원조교제를 하려다 발각된 한 검사가 수치심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경찰의 체포 과정 이외에 프로그램 진행자가 직접 현장에서 가해자를 신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신문 내용이 잔인하리만큼 혹독하다. 시청자 입장에서야 통쾌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자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과연 신문 과정이 진정 보도를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시청률을 위한 것이었는지 논란이 일었고 결국 프로그램은 폐지됐다.

온 사회를 경악하게 한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엄청난 여론이 들끓어야 겨우 그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는 한국과는 달리 미국은 아예 범죄 현장을 TV로 중계해주니 부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저래도 되나 위태롭게 느껴질 때도 있다. 보도가 목적이 아닌, 상업적 목적을 위한 프로그램에 범죄자의 신원을 공개하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범죄는 프로그램 제작자의 입장에서 매우 좋은 소재다. 범죄를 소재로 한 수많은 할리우드 액션영화들이 이를 증명한다. 게다가 범죄 예방이라는 공익적 대의로 포장하기도 쉽다. 그러나 무엇이든 상품화하는 미국에서 공익과 사익의 경계는 참으로 모호하다. 실제로 범죄 예방 효과가 있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방송사가 이익을 보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 말이다.


간지에서 문화부 기자로 근무하다 현재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에서 유학하고 있다. 음악과 문화 등 대중문화 전반에 폭넓은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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