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겨울 저녁의 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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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주택(1959~ ), 「겨울 저녁의 시」 전문

사위가 고요한 겨울 저녁 창 틈으로 스미는
빙판을 지나온 바람을 맞으며, 어느 산골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밤을 견딜 나무들을 떠올렸다
기억에도 집이 있으리라,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 듯이
혹은 내가 나로부터 가장 가깝듯이 그 윙윙거리는
나무들처럼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에 대한 나의 사랑도
추위에 떠는 것들이었으리라, 보잘것 없이 깜박거리는
움푹 패인 눈으로 잿빛으로 물들인 밤에는 쓸쓸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운명을 잡아줄 것 같은 불빛에 잠시 젖어
있기도 했을 것이라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들은
제게도 뜻이 있어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가고
청춘의 우듬지를 흔드는 슬픈 잠 속에서는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창문도 덜컹거리고 있으리라



밤에 따뜻한 집으로 귀가할 때, 매서운 칼바람을 맞는 겨울나무를 보면 종종 그 긴 추위의 시간이 공포로 다가온다. 갈라진 두꺼운 나무껍질과 검은 나이테는 나무가 그 혹독한 추위의 폭력을 제 몸으로 만든 흔적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혹독한 삶 한 가운데에 던져진 생명들, 그것을 견뎌내려고 애쓰거나 좌절하는 시간들, 그것은 포기하거나 증오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 자신의 모습이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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