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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즈펠드, 사병들에 혼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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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미 역대 국방장관 중 최고령(72)이자 콧대 높은 도널드 럼즈펠드 장관이 8일 사병들의 야유성 질문에 곤욕을 치렀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8일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시티 북부에 소재한 우다이리 미군 캠프에서 노후 장비와 복무기간 연장에 대한 장병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쿠웨이트시티 AP=연합]

그는 이날 쿠웨이트 부어링 기지에서 이라크로 배치될 사병 2000여명과 만났다. 사기 진작을 위해 가볍게 마련된 자리였다. 하지만 사병들의 질문이 시작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주 방위군 출신인 한 상병은 "왜 우리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이미 한번 총격을 받고 버려진 고철 조각이나 방탄유리를 찾아내 장갑차를 감싸야 하는 거냐"고 질문했다.

럼즈펠드가 "그게 무슨 소리냐"고 당황한 듯 되묻자 이 병사는 "제대로 된 장갑차가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듣고 있던 다른 병사들은 환호성과 함께 박수를 쳤다. 럼즈펠드도 맞받아쳤다. "우리는 한달에 400대 이상의 장갑차를 공급하기 위해 서두르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지금 주어져 있는 걸로 하는 거지 다 갖춰서 하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한 여군은 "왜 임기가 끝났는데도 못 떠나게 하느냐"고 항의했고, 아이다호주 출신의 또 다른 사병은 "주 방위군 출신들에게 지급되는 장비가 정규군에 지급되는 장비보다 나쁘다"고 주장했다. 지휘관인 한 중령은 "내 부하들이 월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럼즈펠드는 "진정하라, 진정하라"면서 "나는 노인이고, 지금은 이른 아침이 아니냐. 나는 이제 막 정신이 들고 있는 참"이라고 말해 병사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럼즈펠드는 "가능하면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지만 임기가 만료돼도 못 돌아가는 건 전쟁터에서 새로울 것도 없다""정규군과 방위군 출신의 차별은 절대 없다"는 등 할 말은 다했다.

이날 럼즈펠드가 치른 곤욕은 워싱턴의 정가에서도 파장을 만들고 있다. 공화당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우리는 이라크에서 병력을 늘려야 한다. 임기가 끝난 병사들을 계속 잡아두는 건 제대로 된 정책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의원들은 럼즈펠드 장관의 답변이'병사들을 경멸하는 것' '냉담한 발언'이라며 공격했다.

한편 미 언론들도 이날 사태를 비중있게 다루면서 유임 통보를 받은 럼즈펠드가 미군 병사들에게서'혹독하게 당했다(grilled)'고 표현했다. ABC 방송 등은 특히 준비 안 된 이라크 전쟁을 밀어붙여 미군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비판론을 일축해온 럼즈펠드와 부시 대통령이 전선에 나가 있는 미군들에게서 원성의 목소리를 직접 들은 셈이라고 지적했다. 미 언론들은 또 이라크 주둔 미군들이 8000대의 험비 장갑차량을 필요로 하지만 6000대만 사용하고 있으며 수송부대 트럭의 방탄장비가 크게 부족해 생명을 위협받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워싱턴 = 김종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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