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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 도와주십시오, 국민여러분> 6회 : 용병 소방대장 이헌재... 與 이헌재 흔들기에 DJ '경질 직전' 까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踏雪野中去 (눈덮인 광야를 지날 때는)

不須胡亂行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今日我行跡 (오늘 내가 남긴 발자국이)

遂作後人程 (뒷사람들의 길이 되리니)

2000년 1월 1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금융감독원 강당.

금융감독위원회·금융감독원 전 직원 앞에서 금감위원장 이임사를 하던 이헌재는 "외환위기를 맞아 밤을 잊고 애쓴 직원들에게 감사한다. 그간 다들 너무나 고생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면서 김구 선생이 자주 인용했다는 서산대사의 한시(漢詩)를 읊었다.

1998년 4월 1일 금감위원장에 취임해 2000년 8월 7일 재정경제부 장관직을 떠날 때까지 2년4개월 동안 이헌재는 국민의 정부 전반부의 구조조정을 이끌었다.

그를 DJ에게 추천했던 한 사람인 김용환 의원(현 한나라당 국가혁신위원장)의 표현대로 '너무 많은 욕을 먹으면서 너무 많은 일을 했던' 이헌재는, 그러나 그 2년4개월 동안의 숱한 사연들에 대해 여간해서 잘 입을 열지 않는다.

기자에게 이헌재는 손부터 내저었다.

"난 말 안해. 기록도 안남겨. 기록하면 쓰고 싶은 욕심, 쓰다 보면 거짓말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돼 있어. 불리한 건 다 잊어먹고 유리한 것만 기억하고. 누가 다 확인해서 들고와 물어보면 그에 답하는 문답 형식 회고록이라면 모를까."

그러기에 이제부터 쓰는 이헌재 이야기는 다 주변 확인을 먼저 거치고 다시 본인에게 확인하는 '먼 길'을 둘러 간 것들이다.

용병 소방대장-.

언젠가 이헌재는 당시 자신의 역할을 이렇게 압축한 적이 있다.

외환위기 직후 '급한 불부터 끄는' 소방대장으로서 시장을 관리하는 일이 자신의 임무였으며, 그러나 DJ 정부에서 자신은 내내 '정규군'이 될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헌재는 금감위원장 취임 후 반년쯤 지난 98년 10월께 금융계좌 추적 등 철저한 뒷조사를 받는다.

99년 7월에는 경질 직전까지 갔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인사의 회고.

"하루는 김성재 민정수석이 찾아와 '김용환 의원이 신당을 만드는데 李위원장이 모 은행을 통해 자금을 댔다는 얘기가 있다'며 '그를 경질할 것이니 당신이 후임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한마디로 자르고 '설사 그랬다 하더라도 후임을 맡을 수도 없으며 내가 금감위원장감도 아니다'고 거절했다."

금감위원장·재경부장관 재임기간을 통틀어 이헌재가 DJ와 아무 배석자 없이 독대한 것은 딱 한번, 그것도 '약 10분'뿐이었다. 신임하는 경제장관에겐 가끔씩 불쑥 전화를 걸어 "약속 없으면 저녁이나 같이 하자"고 해 한두시간씩 깊은 이야기를 나누곤 하던 DJ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헌재는 DJ의 당선자 시절부터 비상경제대책위원회 기획단장으로 DJ 진영과 인연을 맺기 시작, 국민의 정부 전반부 내내 요직에 있었다.

어떤 인연, 어떤 역학(力學)이 국민의 정부 전반부에 이헌재를 등장시켜 '활용할 만큼' 활용하게 했을까.

여기서 잠시, 믿거나 말거나 이헌재 주변에서 지금까지도 가끔 등장하는 역학(易學) 이야기를 하나 하고 넘어가자.

-이헌재가 '중요한 일을 맡을지 모르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97년 여름 설송(雪松)스님에게서였다. 경북 봉화 현불사(現佛寺) 큰스님인 설송은 서울에 왔던 길에 우연히 이헌재를 만나 나라가 경제적으로 크게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헌재가 "저도 그렇게 봅니다. 굉장히 어려워질 겁니다"고 하자 스님은 이헌재를 물끄러미 보더니 "단단히 준비하고 있으라"고 했다. 현불사는 97년 대선 기간 중 DJ가 갔을 때 탑에서 오색광명이 나와 당선을 예고했다는 일화(逸話)로 일반에 널리 알려졌으며, 내로라 하는 정치인들이 지금도 줄줄이 찾아가는 사찰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어쨌든 97년 대선을 앞두고 조순 한나라당 총재와의 인연으로 이회창 후보 진영을 도왔던 이헌재는 DJ 당선 후 DJ 진영과 인연을 맺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했다. DJ 당선이 확정되던 날 새벽 이헌재는 경기고·서울법대 동기동창인 정대철 국민회의 부총재를 찾아가 "야, 나는 줄 잘못 서서 망했다"며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DJ측과의 첫번째 조우(遭遇)는 아주 빨리 왔다.

DJ 당선 확정 사흘 뒤인 97년 12월 22일, 유종근 전북지사가 정운찬 서울대 교수를 통해 "평소 생각 좀 이야기해달라"고 연락해 온 것이다.

정운찬의 회고.

"柳지사의 친동생 유종일 박사의 대학 시절 지도교수가 나였고, 柳박사가 나를 柳지사에게 소개시켰다. 한은 총재를 맡아달라고 하기에 나는 맞지 않는다고 했더니 그럼 사람이라도 소개해달라고 해서 김종인·이헌재 두 사람을 천거했다."

사실은 이 때 이헌재는 이미 DJ에게 천거돼 있었다.

장성민 당시 당선자 비서(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의 회고.

"당선 확정 하루이틀 뒤 한 언론인으로부터 이헌재에 대한 추천이 들어왔다. 그의 이력서와 함께 그가 쓴 보고서를 들고 DJ의 일산 자택에 가서 단 둘이 있을 때 드렸다. 보통 경제전문가들의 보고서나 의견엔 정무적 판단이 빠져 있게 마련인데 그의 보고서는 정무적 판단을 곁들여 경제위기 해법을 제시하고 있었고 이를 DJ는 매우 높게 평가했다."

여기서 '정무적 판단'이란 '내년(98년) 4월께면 실업사태로 인해 소요가 일어날 것'이란 골자의 내용이다.

이헌재는 이어 97년 12월 말부터 김용환 당시 비상경제대책위원장에 이끌려 비대위 기획단장을 맡아 일하며 다시 DJ에게 깊은 인상을 심는다.

김용환의 회고.

"이헌재는 내가 천거하기 전에 이미 당선자가 결심하고 있었다. 내가 그 사람은 안됩니다 했어도 썼을 것이다. DJ는 비대위 보고를 몇번 받으며 '저렇게 유능한 사람이 있나'고 감탄했다. 한번은 전직 총리 초청 만찬 도중 DJ가 '비대위에 이헌재란 인물이 있는데 이렇게 유능한 관리가 있나 싶어 알아 봤더니 진의종 전 총리 사위더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여기다 DJ가 98년 2월 중순, JP측과 첫 조각을 논의하면서 경제팀을 JP의 자민련 몫으로 떼어 준 것도 결정적이었다. JP 진영의 김용환이 이헌재를 금감위원장으로 지명해 천거했고 이를 JP·DJ 모두 받아들인 것이다.

결국 이헌재는 그렇지 않아도 DJ가 마음에 두고 있던 차에 자민련이 먼저 추천을 해오니 DJ로선 자기쪽 몫을 하나 건지며 쉽게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DJ 주변에선 곧 "이헌재는 안된다"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온다.

김원길 의원(민주·전 정책위의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이헌재는 임명되고부터 당에서 쫓아내려고 했다"고 기억한다.

"금감위원장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당에선 처음에 알지 못했다. 그랬기에 당에서 보면 이헌재는 얼떨결에 된 셈이다.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알고부터는 사방에서 이헌재를 헐뜯었다. 이회창 캠프에 있었다, 재무부 과장밖에 못했다, 율산 사건에 걸려 물러났다, 한국신용평가·대우를 거치며 외곽에서 돌았다 등등 온갖 소리가 다 나왔다. 돈 먹었다고 찌른 경우도 물론 있었다. 이종찬 국정원장 등이 많이 막아주지 않았으면 어찌 될지 몰랐다."

98년 10월께의 이헌재 계좌추적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다.

결국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 즈음 박주선 대통령 법무비서관은 DJ에게 차트를 그려가며 특별 보고를 했다.

12개 시중은행 중 호남 출신 행장이 한명도 없다며 이헌재가 그런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것이었다(당시 최대 규모인 국민·주택 두 국책은행 행장은 호남 출신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DJ는 강봉균 경제수석에게 "호남 사람들이 오히려 은행권에서 퇴출 당하고 있다는 소리가 자꾸 들린다"고 한 적이 있다.

강봉균의 회고.

"내가 인사에 간여하진 않지만 하여튼 파악해보겠다고 했다. 며칠 뒤 '특별히 혜택을 받은 것도 없지만 특별히 불이익을 받았다는 증거도 없다'고 보고했더니 '알았다'고 했다."

민주당 실세들과 이헌재의 관계는 계속 불편했다.

김영재 전 금감위 대변인의 회고.

"李장관은 민주당 의원들을 잘 안만나줬고 의원들은 '이헌재와는 도통 말이 안통한다'며 뻣뻣하다고 했다. 98년 말께엔 내가 하도 답답해 장성민 청와대 국정상황실장 방에 쳐들어가 '당신 그러지 마라. 이헌재 그런 사람 아니다'고 대든 적이 있다."

그렇게 사방에서 이헌재를 흔들었어도 DJ는 그를 1년9개월간 구조조정의 사령탑으로 쓴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던져준 금융·기업 개혁 프로그램을 요리할 기술자로 달리 적임자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기업·은행을 퇴출·수술하는 IMF 프로그램은 손에 피를 묻히는 고된 일이기도 했다.

DJ는 이헌재를 기용하면서 "위기 상황이니 열심히 하라"는 한마디 외엔 아무 말도, 아무 지시도 하지 않았다.

이헌재와의 독대는 딱 한번뿐이었고, 이헌재는 항상 경제·정책기획 수석을 통해 대통령과 '교감'하고 '지시'를 받았다.

은행 퇴출 등 금감위 주요 결정은 이헌재가 해오면 "원칙대로 하라"고만 하는 식이었다.

이헌재를 금감위원장에서 재경부 장관으로 보낸 2000년 1월은, 그 전 해인 99년 말 '국제통화기금(IMF) 졸업'을 선언한 DJ가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개혁 후반기'를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

2000년 8월 7일.

며칠 전 출근 길에 맹장염 수술을 받고 병원에 누워 있던 이헌재 재경부 장관에게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의 전화가 왔다.

"그동안 수고했습니다."

자신의 경질 사실을 보름 전부터 알고 '지루하게' 기다리던 이헌재는 병실에서 퇴임사를 구술해 재경부에 보냈다.

"구조조정은 구색 갖추기나 시늉만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며, 연습도 용납되지 않는 냉엄한 진검승부입니다."

퇴임사의 한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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