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고모부, 당신의 얘기가 그립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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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면서 고모 집에서 살게 됐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킨 고모가 너무 쓸쓸해 하셨기 때문이다. 고모 집은 1층이 고모부가 운영하는 산부인과 진료실, 2층은 입원실이었고 3층에 살림집이 있었다. 환갑을 넘긴 고모부가 더는 입원환자를 받지 않기로 해 나는 입원실 중 하나에 머물게 됐다.

외출도 거의 않고 집과 진료실에서만 생활하던 고모부는 밤마다 한 잔 나눌 수 있는 술친구가 생긴 게 몹시 즐거운 눈치였다. 3층에 올라가면 맛있는 안주와 이름만 들어본 값비싼 양주와 포도주가 준비돼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맛보는 대가는 너무 컸다. 끊이지 않는 고모부의 장광설을 듣노라면 새벽 2~3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요즘 대학생들은 무엇이 제일 고민이야."

"여자 친구 한번 데려와. 내가 진료해줄게."

"탐진치(貪瞋痴)가 뭔지 알아."

한잔 술과 더불어 사색은 무르익고, 밤이 깊도록 고모부의 이야기는 멈출 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군복무 중인 동생이 휴가를 받아 놀러왔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고모부는 우리 형제에게 "밤도 긴데 차나 한잔 할까"하고 제의했다. 그런데 이 철없는 동생 녀석, "맛있는 곡차는 없나요"하며 일어서던 엉덩이를 다시 의자 깊숙이 밀어넣는 게 아닌가.

아이쿠, 제 발목을 스스로 묶는군. 한잔 술이 고모부의 혀를 지나 목을 통과한 뒤 위에서 분해된 알코올이 온몸에 퍼질 무렵, 아니나 다를까.

"내 친구 녀석은 치과의산데 참 불쌍해. 하루종일 냄새나는 입만 바라보고 살잖아."

"젊었을 땐 여자들을 얼굴로만 판단하기 쉽지. 하지만 여성은 또 다른 얼굴이 숨어있어. 그걸 알아야 어른이 되는 거라네."

"세계 여성들을 괴롭혀온 트리코모나스균이 활동하기 쉬운 환경이 무엇인 줄 아나."

위기감을 느낀 나는 벌떡 일어나 말했다.

"아, 깜박 잊고 있었네. 중요한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2층 방문을 닫고 안도의 한숨을 쉰 나는 수화기 코드를 뽑았다. 긴장이 풀린 때문인지 스르르 눈이 감겼다. 한숨 자고 일어나 보니 새벽 3시가 넘었는데 동생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3층으로 올라갔더니 동생은 녹아버린 치즈처럼 소파와 한 몸이 돼 원망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니까 스위스 사람들은 자신의 증조부가 물려준 의자에 앉으며 정신적 일체감을 느끼지. 자네 그러지 말고 한잔 더 하게."

동생은 강펀치를 맞고 그로기 상태에 빠진 복서처럼 비몽사몽 간을 헤매고 있었다.

"고모부, 준이가 체력이 많이 떨어진 것 같군요. 아쉽지만 남은 이야기는 내일을 위해 남겨두시는 게 어떨까요."

간신히 동생을 구출한 나는 그를 부축해 2층으로 내려왔다.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줬더니 벌컥벌컥 들이켠 뒤 "형, 너무해 어떻게 나만 놔두고 가버릴 수 있어"라고 항의했다.

'준이 일병 구하기' 사건이 있은 지 20년 만에 우리 형제는 고모부가 몸져누운 병상 옆에 나란히 섰다.

"아 우리 조카님들 오셨네. 모처럼 차 한잔 하며 얘기해야할 텐데. 내가 고모 몰래 준비해뒀지."

그날 밤 우리 형제는 고모부의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를 이야기에 취해 흐르는 눈물을 가끔씩 훔쳐야 했다. 고모부, 제 아들에게도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셔야 합니다.아셨죠.

유천석(43.회사원.경기도 안양시 석수2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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