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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기약없는'햇볕'집착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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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김대중(DJ)대통령의 거대한 야망은 헝클어지는가. 헬무트 콜 전 독일총리의 길을 걸으면서도 독일식 흡수통일과 다른 극적인 통일 기반을 마련하려는 구상이 야망 속에 있었다.
통일은 동·서독 문제만이 아니라며 주변국 지도자의 설득·협조를 끌어낸 콜의 외교적 성취는 DJ의 모델이었다. DJ는 한반도주변 4강 지도자를 햇볕정책의 팬클럽 회원처럼 만들려 했다. 6·15 정상회담과 노벨상 수상까지 그런 구상은 빛났다.
그러나 지금 미국·일본이 햇볕정책에 거는 제동은 거칠고 거침없다. '북한은 악의 축'이라는 부시 미국대통령의 공세엔 DJ의 입장은 뒷전이다. 한승수 외교통상부장관의 귀국길 경질 장면은 부시에 대한 불쾌감 표시로 비춰진다.
지금의 긴장은 김영삼(YS)정권 임기말을 떠올린다. 그때 북한 잠수함 침투를 놓고 "평양의 사과 없이는 대화 없다"는 YS의 강경책에 클린턴은 질렸다. 지금은 "북한을 압박하지 말고 체면을 봐주라"는 식의 DJ의 유화책에 부시는 짜증을 낸다.
DJ정권의 한·미관계는 밀월에서 냉각으로 바꿨다. 임기 초 DJ의 아시아적 가치 비판, 경제와 민주주의 병행발전론은 미국의 조야에서 각광을 받았다. 미국에는 IMF 없는 말레이시아식 경제회복에 나선 마하티르 총리의 콧대를 꺾는 데 DJ방식이 활용가치가 있었다. DJ의 인권 열정은 미국의 대중국 인권외교에 흥미있는 원용 사례였다.
이제 미국은 DJ에 대한 우호적 관점을 버린 듯하다. DJ의 독자노선은 9·11테러 이후 테러방지·대량살상무기 퇴치에 집중하는 미국의 새로운 전략구도에서 벗어나 있다는 판단이 깔렸다. 인간적 신뢰도 금이 가 있다. 미국은 DJ가 공조를 다짐하면서도 결정적 시점에서 이를 외면한다고 의심한다. 주한미군이 한반도 안정의 바탕이라는 DJ정권의 평가와 달리 우리 사회 일각의 반미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방치한다는 불만도 엿보인다.
일본도 DJ 햇볕정책이 한·미·일 남방 3각공조보다 북방에 치중하고 있다고 불만이다. 일본은 최근 조총련의 자금줄을 차단해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DJ외교의 북방 쪽 효과도 불투명하다. 중국의 경우 우호의 경계선이 있고, 햇볕의 원군으로 한계가 있다. 지난해 초 우리측은 미국의 반발 속에서도 러시아의 희망대로 탄도탄 요격미사일(ABM)제한협정의 보존·강화를 약속했다. 그런데 지난해말 러시아는 태도를 바꿔 미국의 ABM탈퇴 의사를 묵인했다. 결국 부시와 사이만 나빠졌고, 러시아의 대국외교에 이용당한 셈이 돼버렸다.
햇볕의 기세는 이처럼 움츠러들었고 한계점에 다다랐다. 9·11테러로 국제정치의 게임룰도 바꿨다. 햇볕의 집착은 기약없는 낙관론처럼 드러난다. 그럼에도 DJ정권의 햇볕 집념은 유별나다. 장기적으로 미국의 반테러 전략에 도움이 되는 만큼 인내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부시의 강공은 오만이며, 긴장을 키운다'는 논쟁에 기대어 미국의 변화를 이끌어내려 한다.
한·미간 긴장은 복잡미묘해지고 있다. 우리 내부의 국론 갈등이 겹쳐 있다. '부시 오만론'은 남북문제의 당사자인 한국을 제쳐놓은 대북 밀어붙이기가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이다. 반대쪽 논리는 햇볕을 아무리 북한에 쬐어도 주민의 굶주리는 참상을 고치기보다 대량살상무기에 의존하는 김정일 체제의 변화없는 모습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냉전시대 콜의 역정에는 전략적 우선순위의 조절이 돋보였다. 미국과 옛 소련의 긴장이 커지면 민족·당사자의 원칙·명분을 뒤로 돌리며 세련되게 상황을 관리했다. 그같은 전략적 탄력성이 DJ정권에 절실한 시점이다. 그것은 햇볕의 바탕이 한·미간 효율적 협조라는 점을 되새기는 일이다. 공조 회복에 우선 힘을 쏟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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