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아프간 포로는 어디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장관이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를 한다. 장관은 대통령에게 결정을 뒤집으라고 요구한다. 다른 장관들과 대통령의 참모들은 대통령에게 결정을 뒤집지 말라고 진언(進言)한다. 대통령 진영의 누군가가 이런 갈등의 내막을 슬쩍 신문에 흘려 논쟁은 글로벌화된다.

이것이 쿠바의 미군기지로 끌려간 아프가니스(탈레반과 알 카에다) 병사들의 처리를 놓고 조지 W 부시 정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의 줄거리다.

부시 대통령은 아프가니스 병사들은 정규 군인이 아니라 불법적인 전투원들이기 때문에 전쟁포로의 처리에 관한 제네바 협약에 따른 대우를 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부통령 체니, 국방장관 럼즈펠드, 법무장관 애슈크로프트와 백악관 참모들이 부시 대통령의 결정을 지지한다.

*** 알카에다 처리 싸고 갈등

국무장관 파월만이 국제관계를 고려해 제네바 협약이 규정한 전쟁포로의 권리를 아프가니스 병사들에게도 보장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린다. 파월은 아프가니스 병사들에게 전쟁포로 대우를 거부하고 그들을 미국의 군사재판정에 세우면 유럽에서 당장 인권 시비가 일어나 테러와의 전쟁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국제적인 연대가 위태롭다고 걱정한다.

파월의 주장대로 하면 아프가니스 병사들은 이름.계급.군번 말고는 아무 것도 밝히지 않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들한테서 탈레반과 알 카에다 조직을 알아내고 오사마 빈 라덴을 잡는 데 필요한 정보를 얻어 내려는 국방부의 계획이 차질을 빚는다. 아프가니스 처리에 관한 갈등은 이렇게 국무부와 국방부의 현실적인 이해가 얽혀 있어 어느 한쪽의 양보가 쉽지가 않다.

벌써 유럽공동체(EU).독일.영국.프랑스가 아프가니스 병사들에게 제네바 협약을 적용하라고 압력을 넣고, 독일은 외무장관이 미국 대사를 직접 불러 부시 대통령의 결정을 재고하라고 강력히 요구했다. 미국이 관타나모 기지로 압송한 아프가니스 포로는 1백58명이고 아프가니스탄에 3백2명이 더 남았는데 유럽의 반대 여론으로 포로 이송이 일단 중지됐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입장을 근본적으로 굽힐 것 같지는 않다. 사실 미국은 지구상 모든 나라의 인권에 참견을 하는 나라다. 러시아의 체첸,중국의 티베트와 신장(新疆), 이란과 이라크, 북한의 인권에 관한 시비가 대표적인 사례들이고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는 아예 인도주의적인 명분을 내세워 군사적 개입까지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로니컬하게도 인권국가 미국은 동시에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에서 불법적으로 힘을 사용한 데 대해 유죄를 선고받은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이기도 하다. 미국은 1980년대에 니카라과의 좌파 산디니스타 정부에 반대하는 콘트라 반정부세력을 무력으로 지원했다. 불법적인 힘의 사용이란 테러의 점잖은 표현이다.

산디니스타 정부의 제소를 받은 국제사법재판소는 미국에 니카라과에 대한 무력간섭을 중지하고 피해를 보상하라고 판결했다. 레이건 정부는 그따위 판결에 따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니카라과는 문제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총회로 가져갔다. 안보리에서는 미국의 거부권, 총회에서는 미국과 이스라엘의 반대에 부닥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 인권 일관원칙 세웠으면

니카라과가 아니더라도 인권에 관한 미국의 기록은 깨끗하지가 않다.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는 간접적으로 수십만 이라크 민간인들에게 고통과, 때로는 죽음을 안긴다는 비난을 받는다. 98년 클린턴 정부는 수단의 말라리아 치료약의 절반을 공급하는 제약회사를 폭격해 가난한 수단 국민이 값싼 국산약을 살 수 없게 만들었다는 원성을 들었다.

터키에서는 쿠르드족 '인종청소'를 지원했다는 명예롭지 못한 의혹도 사고 있다. 전제군주가 다스리는 산유국들의 인권유린에는 침묵하고,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이 입는 테러피해만 일방적으로 동정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치밀하게 계획되고 잔인하게 수행된 9.11테러가 미국인들에게 준 충격을 고려하면 부시 정부가 아프가니스 병사들을 부드럽게 다루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다만 이번 포로 논쟁이 미국으로 하여금 남의 나라의 인권에 대해 일관된 원칙을 세우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