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국민 설득 어려운 개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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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오래 끌어오던 개각이 단행됐다. 계속 불거져오는 비리사건이 대통령의 처조카.수석비서관으로 확산되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을 압박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단행된 개각이라 국민의 관심이 클 것이라 생각했으나 별로 반응이 없다. 분개하는 시민도, 박수치는 시민도 없이 그저 시큰둥하다.

*** 정부의 이재풀 소진됐나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대통령 후보의 국민경선제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 있는 민주당도 이번 개각을 보며 그리 밝은 얼굴빛은 아닌 것 같다. 동교동계와 친분이 두터운 전윤철 장관을 청와대 비서실장에, 그리고 박지원 전 수석을 정책특보에 임명한 것에 대해 민주당 내 쇄신파들은 의아해하고 있다.

이번 개각을 보면서 국민의 정부 인재풀이 소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대통령과 민주화를 함께 추진했던 인사들과 오랫동안 억압받아오며 정권교체를 이룬 특정지역 인사들만으로는 국민의 정부 출범부터 인재풀이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눈을 밖으로 조금만 돌리면 인재는 많다. 요즈음 특별검사팀이 밝혀내는 비리상황을 보면서 국민들은 이전에 수사를 담당했던 검찰을 탓하기도 하지만 한편 이렇게 참신한 특별검사들이 아직도 있구나 하는 희망과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사실 인재가 없는 것이 아니다.많은 인재를 제대로 발굴 못한 것이 문제다.

장관직과 청와대 수석을 맡게 된 한사람, 한사람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미적지근한 개각으로 임기를 마무리하겠다는 金대통령의 자세가 더욱 심각한 문제다. 비록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연두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 부패척결과 국정쇄신을 강조할 때 새로운 내각의 출범에 큰 기대를 했었다. 민심을 수습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가 조각 수준의 개각이었기 때문이다.

이번 개각에서 국정쇄신의 기운을 느낄 수 없다. 지난 해 11월 민주당 총재직을 떠나는 결연한 마음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 1년 행정부를 제대로 챙길 진용을 짤 것으로 기대했으나 역시 불발로 끝났다. 부패와 비리를 척결하고 깨끗한 정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국정을 운영하겠다는 의지보다는 현상유지와 안정에 치중한 개각이다.

우선 국정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총리를 유임시켰다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DJP 공조의 상징인 이한동 국무총리가 DJP 와해 이후 총리직에 남은 것은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보아 정국안정이라는 이유가 조금은 타당성이 있었으나 현 시점에서 李총리의 유임은 납득하기 어렵다.

조각 수준의 개각이 불가능하였다면 내각의 얼굴인 총리의 교체는 마땅히 이뤄졌어야 했다. 내각의 안정보다는 쇄신과 개혁으로 국민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더욱 중요한 시점이다.

李총리의 유임이 확정되면서 DJP 만찬회동이 이뤄지는 것도 어쩐지 개운치 않은 대목이다. 각계 지도층을 만나는 연장선상에서 이번 회동이 계획됐다고 하지만 오비이락으로 끝날지 두고 볼 일이다. 정치권 일각에서 불고 있는 내각제 개헌론이나 합당의 논의로 확산된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당 총재직 사퇴 이후 표방한 정치배제의 원칙은 물거품이 된다.

*** 불안 할수록 훌훌 벗어야

金대통령에게 '심호흡 정치'를 부탁하고 싶다. 金대통령이 민주당 총재직을 떠날 때 당내의 많은 사람이 당의 진로에 대해 걱정했으나 오히려 민주당은 당개혁의 계기로 삼아 나름대로의 행보를 내딛고 있다. 그후 金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가 높아진 것도 사실이다. 훌훌 벗어버리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심호흡의 원리가 그렇지 아니한가.

가슴 속의 모든 공기를 몸밖으로 내뿜으면 곧 새로운 공기가 가슴을 채워주는 원리다. 앞으로 1년 한국정치를 새롭게 탈바꿈시키기 위해서는 金대통령이 미련없이 버려야 할 것이 아직도 많다. 대통령 자신과 친인척.동교동계.민주당을 1년간만 버리면 국민의 마음은 대통령에게 다가간다.불안할수록 심호흡을 하면 자신감이 생기고 힘이 축적된다.

이번 개각으로 중책을 맡게된 분들에게 한가지 부탁한다. 앞으로 1년의 임기를 단순히 지난 4년을 뒤치다꺼리하는 것으로 생각해선 안된다. 김대중 정부 5년 임기 중의 1년이 아니라 진정한 한국정치의 21세기를 여는 한해로 생각해주길 바란다. 모두 심호흡을 하면서.

李政熙(한국외국어대 교수 ·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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