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내상 정몽준, 대선주자 위상에 흠집 남긴 채 남아공으로 떠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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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위원장으로서 커다란 책임을 느낀다. 이 자리에서 사퇴의 뜻을 밝히고자 한다.”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의 입가가 가늘게 떨렸다. 6·2 지방선거 중앙선대위 회의가 열린 3일 서울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비공개 회의 뒤 조해진 대변인은 “정 대표와 다른 최고위원들도 사의를 표명했다”고 전했다.

정 대표는 “우리 스스로 자만했다는 게 제일 아쉽다”는 말을 남기고 당사를 떠났다. 지난해 9월 박희태 전 대표의 재·보선 출마로 공석이 된 대표직을 승계한 뒤 9개월 만에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에 책임을 지고 불명예 퇴진한 것이다. 그는 이날 국제축구연맹(FIFA) 총회 참석차 월드컵이 열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출국했다. 측근들은 “15일 귀국할 때까지 향후 진로에 대해 정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 대표에게 이번 패배는 깊은 내상을 남겼다. 전통적으로 당의 기반이 강한 강원·경남·충북에서 광역단체장 선거를 패한 데다 서울에선 구청장 25명 중 단 4명만 살아남았다. 박근혜 전 대표가 4년 전 지방선거에서 수도권 압승을 일군 것과 격하게 대비되는 결과다.

특히 자신의 지역구인 동작구청장 선거조차 직접 발굴한 이재순 후보가 민주당 후보에게 패했다. 지방선거 승리를 발판으로 전당대회에서 승계 대표가 아닌 온전한 당 대표로 거듭나려고 했던 정 대표의 구상은 일그러졌다. 대권주자로서의 위상에도 흠집을 남겼다.

결과는 과정까지도 부정하게 만든다. 정 대표가 대표직을 수행하는 동안 당내 친이·친박계는 사석에서 ‘존재감 없는 대표’란 비판을 해왔다. 6선 의원이지만 한나라당 가족이 된 건 18대 총선 직전인 2007년 말이기 때문이다. 원톱 선대위원장으로 치른 이번 선거는 결과에 따라선 당내 기반을 더 단단히 다질 기회였다.

그러나 거꾸로 최악의 참패를 기록한 대표가 됐다. 당 일각에선 “선거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이상 차기 전당대회에도 불출마해야 한다”는 야박한 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친이계의 한 의원은 “‘관리형 대표’로서 인사나 공천도 마음대로 못한 사람에게 불출마까지 하라는 건 무리한 요구”라고 변호했다. 한나라당은 당분간 ‘당 대표’ 없이 김무성 비상대책위원장 체제로 꾸려가게 됐다.

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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