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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격 당한 MB식 무소통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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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이런 심정은 노 전 대통령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대통령들은 국내 정치를 싫어한다. 외국에 나가면 국가원수로 최고의 예우를 받는다. 그런데 정작 최고통치자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국내에서는 정치의 한 파트너가 되고, 평가를 받아야 하니 그럴 만도 하다. 정치는 군림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하고 타협하는 것이다. 목에 힘이 들어가면 싫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권력을 놓으려는 사람은 없다. 무능한 정치인일수록 영향력만 움켜쥐고 대화는 않고, 책임은 지지 않는다. 하지만 김종필 전 총리의 말처럼 ‘민심은 호랑이와 같다’. 책임이 따르지 않는 권력은 없다. 6·2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한 가장 큰 원인도 거기에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는 당에서 알아서 하라”고 말해왔다. 말이 좋아 ‘당정(黨政) 분리’다. 정치에 손을 놓은 것도 아니다. 놓을 수도 없다. 대통령의 모든 국정이 정치행위다. 애지중지하는 4대 강 사업도 정치적 노력 없이는 한 발도 나아갈 수 없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일 수밖에 없다. 야권 후보를 찍은 표는 대부분 대통령의 독주에 대한 심판이었다. 당의 주류는 친이(親李)계가 장악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도 측근들을 후보로 내보냈다. 김두관 후보와 전·현직 행자부 장관끼리 이명박-노무현의 대리전을 치른 이달곤 후보가 대표적이다. 서울과 경기도 교육감 후보에도 그의 의중을 실었다. 그렇지만 보수후보의 난립만 조장하고 말았다. 그 바람에 한나라당에는 지휘관 없이 부사관들만 우왕좌왕했다.

며칠 전 양구의 펀치볼을 다녀왔다. 그곳 전쟁기념관에 놓인 한 사병의 조각상이 눈길을 끌었다. 벽을 등지고 총을 어깨에 걸친 채 책을 읽는 모습이다. 영화 ‘사랑할 때와 죽을 때(a Time to Love, a Time to Die·1958)’의 엔딩 장면을 연상시키는 자세다. 스토리야 다르지만 보수진영이 몰락할 위기 국면에, 초연(硝煙)을 잊고 뒤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것도 모른 채 사랑의 꿈에 취한 군인의 최후가 지금 여당과 다르지 않다. 정치인은 ‘다툴 때와 손잡을 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한나라당 위기의 출발은 이 대통령의 취임 직후부터 끈질기게 이어져온 내부 갈등에 있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한다. 보수가 분열까지 하면 살아날 구멍이 없다. 오히려 야권이 적극적으로 힘을 끌어모았다. 경쟁관계인 정세균 민주당 대표와 손학규·정동영 전 대표가 손을 잡았다. 경기도를 내주면서까지 야권 단일 후보를 만들어냈다.

실마리는 이 대통령이 풀어야 한다. 세종시 문제든, 4대 강 문제든 대통령이 나서지 않고는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취임 이후 기자회견다운 기자회견 한 번 하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표의 손도 잡지 않았다. 온건파라는 정세균 민주당 대표조차 끝없이 장외(場外)로 나서게 했다. 국민에게는 가르치려고만 했다. 재·보선 패배 후 정무 기능을 보완한다고 했지만 달라진 게 없다. 당내에서조차 동의를 얻지 못한 세종시 계획을 어떻게 바꾸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4대 강을 청계천처럼 일단 밀어붙이면 된다는 생각이라면 큰 착각이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있다. 이제 그마저 놓쳐 포기를 해야 할 지경이 됐다.

이 대통령은 낯가림도 심하다. 아는 사람이 아니면 기용을 않는다. 회전문 인사라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 키운다는 생각은 애당초 보이지 않는다. 일개 건설회사, 공무원으로만 구성된 서울시 정도라면 그래도 굴러갈지 모른다. 국정은 다르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야말로 얼마든지 좋은 인재를 끌어안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닌가.

문제는 다음 선거라고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득표 내용을 보면 한나라당이 우세를 보인 건 50대 이후 세대뿐이다. 한나라당 후보가 이긴 지역에서조차 20~40대 유권자 층에서는 고전(苦戰)했다. 미래세대의 교육을 맡을 교육감 선거 결과는 보수층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한다. 보수세력이 걱정하는 건 이 대통령의 임기가 아니다. 보수세력의 몰락이다. 이런 식으로는 다음 총선, 대선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모든 출발은 소통이다. 대통령이 정치를 외면하는 건 무책임 정치일 뿐이다.

김진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