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가 클로즈업] 의리·정 사라진 여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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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임오년 새해 방송사마다 각종 특집 프로그램을 준비하느라 바쁘다. 이때 PD들을 가장 괴롭히는 것 중 하나가 연예인 출연 섭외다.

예전엔 '백전화불여일면'(百電話不如一面), 즉 한번 만나는 게 백번 전화 통화하는 것보다 낫다는 간단한 섭외 수칙이 통했다.

그러나 이젠 만나러 다녀도 별 소용 없다. 따라서 섭외 잘하는 PD가 최고 대우를 받는 판이다. 연예인들이 출연 기회를 잡을까 싶어 PD 회의실을 기웃거리던 풍경은 아예 '전설'로 통한다.

방송가에서 한해를 정리하는 연말 시상식. 특히 지난 해 말에는 유난히 공동 수상도 많았고, 시상 분야도 세분화됐다. 여기엔 어느 특정 연예인에게 혜택을 주기 어려운 방송사의 고충이 숨어 있다. 스타와의 좋은 관계가 다음 해 섭외에서 당의정 역할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것은 연예계가 점차 인간미를 잃어가는 점이다.

필자는 1991년 공채 탤런트로 방송 생활을 시작한 한석규를 '우리들의 천국'조연출을 하면서 알게 되었다. 당시 종암동이 그의 집이었는데 좌석버스를 타고 다니는 그를 자주 보곤 했다.

그는 어느 날 나와 지금의 내 아내와 생맥주를 마시면서 "형 결혼할 때 내가 사회 볼게"라는 말을 던졌는데,'서울의 달'로 스타덤에 오른 후에도 그 약속을 끝내 지켰다.

그가 '국가 대표급' 영화 배우가 되고 내가 '섹션TV 연예통신'을 제작할 때도 그는 종종 아날로그 시대의 추억을 얘기하며 특종 거리를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의리와 정을 요즘 연예계에서는 찾기 어렵다. 어떤 n세대 스타가 대중들을 평민이라고 표현한 해프닝은 유명 연예인들과 대중의 괴리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당대의 톱가수 C씨가 신입 PD 환영식에 참석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그대 품 안에'로 톱스타가 된 차인표와 여관에서 한방 쓰며 뒹굴었던 가족적인 시절이 불과 10년 전이다.

아주 먼 과거의 일도 아닌데 세기가 바뀐 여의도는 살풍경해졌다. 좌석버스를 타고 다니던 스타는 기억 저편에서나 존재하고, 연예인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고가의 외제차를 선호하는 것이 요즘 풍속도다.

촬영을 며칠 앞두고 경쟁 방송사로 말을 바꿔 탄 스타 얘기는 이제 가십거리도 안될 정도다. 창 밖으로 겨울 바람이 휙 지나간다. 갑자기 따뜻했던 10년 전 그 겨울이 그립다.

이흥우 MBC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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