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애써 키운 반도체 기반 무너질까 우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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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공학 연구는 얼마나 강한 국내 기업이 배후에 버티고 있느냐에 따라 발전 속도와 성과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린 있던 기반마저 없애려고 하니…."

23일 충남 천안 상록리조트에서 열린 반도체 연구성과 발표 세미나에 참석한 한 반도체기술 연구원이 하이닉스 반도체의 해외매각을 걱정하며 한 말이다.

이날 세미나는 반도체 기술 개발 인력들이 모처럼 모여 자신들이 개발한 기술들을 소개하고 자랑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 그러나 3백여명의 참석자들 사이에선 '한국 반도체의 앞날'을 걱정하는 푸념만 터져나왔다.

◇ "반도체입국 흔들린다"=반도체 기술인들은 세계 3위의 D램 업체를 해외에 매각할 경우 '반도체입국'을 꿈꿨던 자신들의 희망도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며 한숨지었다.

KAIST 경종민(전기.전자공학과)교수는 "하이닉스가 해외에 팔리면 복수업체가 부추겼던 경쟁적인 산학협동이 흐트러지면서 연구부문이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자동차 분야에서 구조조정 및 대우차 매각협상 과정에서 많은 연구인력이 떠나고 학생들도 지원을 꺼리게 된 것처럼, 반도체도 삼성전자 하나만 남게 된다면 연구인력의 이탈현상이 불보듯 뻔하다며 걱정했다.

한 반도체 장비업체의 연구원은 "대형 수요처가 한 개 없어지면 국산 장비개발도 퇴보할 수밖에 없어 장비업체들은 벌써부터 사기가 꺾인 모습이 역력하다"고 말했다.

최근 학생들 사이에 번지는 이공계 기피현상도 한국의 기반기술 업체들을 해외에 내다 파는 일이 빈번해진 결과라는 비판도 많았다.

서울대 한민구(전기.컴퓨터공학부)교수는 "외환위기 이후 많은 기술기업들이 외국으로 넘어가거나 부실화하는 과정에 엔지니어들이 퇴출되면서 좋은 인력들이 기술보다 고시나 MBA(경영학석사) 쪽으로 몰리는 현상이 강해졌다"며 "국내 산업을 지키지 않으면 기술인력의 이탈이 가속화해 한국은 더이상 만들어 팔 물건도 없어질지 모른다"고 말했다.

◇ "축적된 기술도 빠져나간다"=반도체 기술인들은 하이닉스에 대해 한마디로 "아깝다"고 표현했다. 한 국책연구소 연구원은 "기술력 면에서 마이크론은 하이닉스를 따라올 수 없다"며 "경쟁자인 마이크론에 한국 기술이 날개를 달아주면 곤란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김형준(재료공학부)교수는 "하이닉스는 지난 2~3년간 설비투자를 극소화하면서도 생산물량이 줄지 않았고, DDR 같은 차세대 반도체도 제때 시장에 내놓는 등 최소 투자로 효율을 극대화했다"며 "이를 미국에 넘겨준다는 것은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라고 말했다.

한 반도체연구 관계자는 "반도체산업 불모지에서 기술인들이 밤을 새워 연구해 세계 반도체강국의 터전을 일궈놓았고, 반도체를 국내 GDP의 5%를 차지하는 전략산업으로 만들어 놓았다"며 "외환위기 때처럼 절박한 상황도 아닌데 국가 전략산업을 쉽게 내다 파는 건 기술인들의 사기를 꺾는 등 파급효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울분을 터뜨렸다.

천안=양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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