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B] 찬호여 '영웅의 길' 그길을 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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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길-.'전설'과 '특급'이 함께 길을 가고 있다. 사진의 두 인물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좌완투수 샌디 쿠팩스(67)와 박찬호(29). 마주 닿을 듯한 쿠팩스의 손에는 홈플레이트가, 박찬호의 손에는 글러브가 쥐어져 있다.

쿠팩스는 사진 아랫부분에 "찬호,(인생은)기나긴 여정이네. 쉼없이 정진하게. 행운이 함께 하길…"고 쓴 후 자필서명을 곁들였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god의 노래 '길'과 이 사진이 주는 메시지가 꼭 닮았다. 박찬호가 애지중지하는 이 사진은 텍사스 레인저스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올해 그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쿠팩스는 지난 6년간 LA 다저스가 플로리다주 베로비치에 스프링캠프를 열 때마다 나타나 박찬호의 훌륭한 개인교수가 돼왔다.

사전 연락도 없이 홀연히 홈플레이트 하나만 달랑 들고 나타나는 쿠팩스에게서 박찬호는 제구력을 안정시키는 방법도 배웠고, 정신적으로 성숙해지는 '길'도 배웠다. 쿠팩스는 버트 후튼.오럴 허사이저 등 박찬호가 손가락으로 꼽는 진정한 '사부'가운데 한명이다.

1955년 스무살의 나이에 브루클린 다저스(LA 다저스의 전신) 유니폼을 입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한 쿠팩스는 입단 7년째인 61년부터 전성기를 구가한 '대기만성'의 표본이다.

그는 63년 25승, 65년 26승, 66년 27승을 올려 투수최고의 영예인 사이영상을 세번이나 수상했고, 한번의 퍼펙트게임과 세번의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전설적 투수다.

그는 27승9패, 방어율 1.74라는 초인적 성적을 올린 66년 시즌을 끝낸 뒤 서른한살이라는 한창의 나이에 정상에서 은퇴를 선언해 더욱 신화적인 존재가 됐다.

그의 전성기 때 명감독 화이티 허조그는 "월드시리즈 우승후보가 되는 것은 간단하다. 베이브 루스와 샌디 쿠팩스만 있으면 된다"고 했고, 전설의 강타자 윌리 스타젤은 "쿠팩스의 볼을 때리는 것은 포크로 커피를 마시는 것과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는 은퇴 후 코치나 프런트로 와달라는 빗발치는 제의를 모두 거절하고 은둔생활을 함으로써 더욱 신비스런 인물이 됐다. 박찬호는 그런 쿠팩스로부터 투구 폼 교정을 받았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교훈도 얻었다.

99년 13승11패로 다소 부진했던 박찬호가 스프링캠프를 통해 제구력을 안정시키고 2000년 18승11패로 성적이 치솟았던 데에는 쿠팩스의 '과외지도'가 단단히 한몫을 했다. 박찬호가 명상과 참선에 심취하게 된 것도 쿠팩스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지난 6년간 쿠팩스와 사진 속의 베로비치 캠프 길을 함께 걸었던 박찬호는 오는 2월 15일부터 레인저스의 캠프인 포트샬럿으로 옮겨 홀로서기를 시도한다. 레인저스에서의 임무는 제1선발. 박찬호로서는 '가지 않은 길'이자 새로운 도전이다. 그 길의 끝에서 박찬호의 꿈은 이뤄질 것이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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