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보안법 갈등과 새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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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지금 우리 사회는 보수.진보 간, 소득계층 간, 세대 간, 이익집단 간의 갈등현상이 첨예화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소득 2만달러 이상의 선진국을 향한 우리의 꿈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보안법 개폐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북한과의 관계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를 멋지게 조정하고 합의를 이끌어내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회가 할 일이고 정치의 본령인 것이다.

그런데 현재 국회 법사위에서 보여주고 있는 국보법 폐지안 상정을 둘러싼 정치권의 욕설과 몸싸움의 추태는 다시 한번 국민을 실망시키고 있다. 열린우리당의 경우 공정거래법 본회의 처리 무산 이후 여러 가지로 조급해진 면은 있겠으나 그럴수록 냉정을 찾아 합리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 어떻든 지난 50여년간 엄존해 온 국가보안법을 하루아침에 폐지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무리인 것이다. 우선 한나라당의 당론 결정을 돕고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이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 최종적인 쟁점에 대하여는 공청회도 열어야 할 것이다.

사실 열린우리당의 현재의석 다수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정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새로운 정치를 바라는 국민의 제16대 국회, 국회의원들에 대한 불신과 탄핵 반대정서에서 비롯된 반사적 효과로 볼 것이지 스스로의 업적에 대한 지지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은 이번 기회에 그러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해 국민의 진정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제16대 국회의 한나라당 이상으로 국민에게서 외면당하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그런데 새로운 정치의 요체는 개혁입법의 내용보다 바로 양보와 타협이라는 정치행태에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의 폐지가 아니고 대체입법이나 부분 개정이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커다란 진전이며 만약 합의만 된다면 결국 열린우리당의 업적이 된다고 본다. 각 당의 논의과정을 보면 내용상 충분히 가능하다고도 보인다.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보안법 개폐의 내용보다 국민적 합의임을 명심해야 한다.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은 궁극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유지와 경제발전.국리민복에 있는 것이지 국가보안법의 폐지만은 아닐 것이다.

한나라당도 국가보안법 개폐 논의에 적극 임하여 타협해 줘야 한다.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히 되고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북한과 사실상의 경제교류가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재의 국가보안법 체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생각이기 때문에 한나라당은 이를 회피하는 자세로 현 체제를 유지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당도 각각의 입장이 있겠지만 그것을 주장하기보다 살신성인의 자세로 중간적 역할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대타협이라는 목적 달성에 기여해야 한다. 이야말로 국민의 신뢰가 커지고 지지기반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국가보안법 개폐 입법 문제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전에 관한 중차대하고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많은 국민이 인식을 공유하는 가운데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본다. 만약 국민적 공감대가 넓고 깊다면 어떤 내용이 된다 하더라도 사실상 별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입법자이자 정치의 핵심인 국회의원에게는 개폐 입법의 내용보다 합의처리가 우선임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정치권이 대타협해 국민적 신뢰를 얻고 그로써 상생의 새로운 정치 계기를 마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많은 국민이 지켜보면서 크게 양보하는 정당과 정파에 보다 큰 지지를 보낼 것을 확신하는 바다.

이관희 한국헌법학회장·경찰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