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내 생각은…

영국 여왕에 선물한 영화 특정감독 작품에 편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3면

'취화선''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 영국에서 극진한 환대를 받고 귀국한 노무현 대통령이 영국 엘리자베스 2세에게 선물했다는 한국 영화 DVD 목록이다. 영국은 최근 '러브 액츄얼리''노팅힐' '브릿지 존스의 일기' 등 남녀 간에 벌어지는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 지구촌 흥행가를 석권하고 있는 영화 강국이다. 특수효과가 난무하는 할리우드와는 차별적인 인간적인 휴먼 스토리로 영국만의 특화된 흥행 전략을 세워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적인 안목이 뛰어난 영국에서 국민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고 있는 최고 통치권자에게 증정한 한국 영화 목록이 특정 감독의 작품으로 치중돼 있고 또한 밝은 면보다는 어둡고 반항적이고 우울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작품이 선택됐다는 소식은 현 정부의 홍보의식 부재 및 편향된 의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라고 본다.

'영화는 재미를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정치.사회적으로 만연된 여러 문제점을 고발해야 하는가?'라는 상반된 제작 경향은 영화가 탄생한 1895년 이래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논쟁 중 하나다. 대다수 관객이 두시간 내외의 시간과 입장료를 내고 극장을 찾는 것은 현실 생활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웃고 즐길 수 있는 여흥의 수단으로 영화를 택한다고 생각한다. 이 때문에 여성 관객들은 현실 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속좁고 옹졸한 남자 대신 자신의 처지를 100% 이해해 주고 매너 좋고 기품 있는 은막의 남성의 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신데렐라가 된 듯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남성 관객들도 화면에서 수퍼맨 같은 사나이가 등장해 정의가 반드시 승리하고 악한이나 범죄자가 징계받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해서 착한 이들이 손해를 보는 현실 생활의 불합리에서 벗어나 대리만족을 만끽할 수 있는 것도 영화예술만의 장점이라고 본다. 이런 저간의 이유로 흔히 영화에 대해 '꿈의 판타지를 아낌없이 제공해 주는 천국'이라는 애칭을 붙였다고 생각한다.

이창동 감독은 이미 유럽영화권에서 '예술 감독'으로 칭송받고 있는 주역이다. 그렇지만 유럽영화권의 지주 역할을 하고 있는 국가 지도자에게 한국 영화의 현주소를 홍보하려는 목록 중 4분의 3이 특정 감독의 작품으로 채워졌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옹졸한 선택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선택을 한 문화관광 정책의 일선 보좌진의 편향된 의식에 우려를 보낸다.

이창동 감독은 어느 인터뷰를 통해 '세상의 고통과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연출변을 공개한 적이 있다.

물론 영국에서도 대니 보일 감독이 마약과 공금 횡령, 그리고 핵전쟁 이후 묵시록적인 지구 풍경을 담은 '트레인스포팅''쉘로우그레이브''28일 후' 등을 공개하고 있다.

하지만 대처 정부의 산업 합리화 정책으로 졸지에 실직자가 된 광부들이 교향악단 대회에 출전한다는 '브래스트 오프'를 비롯해 생계를 위해 중년 남성들이 누드쇼를 벌인다는 '폴 몬티', 자식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탄광촌 파업 와중에 근무를 자원한다는 아버지의 행적을 다룬 '빌리 엘리어트' 등을 통해 영국 정치권에 대한 비판적인 감정을 훈훈한 메시지 속에서 표현하는 성숙함을 보여줘 우리 영화인들에게 반면교사가 되고 있다.

여기서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단지 국가 최고 지도자끼리의 호의적 선물 교환 품목에 들어있는 영화 리스트에 자신과 우호적인 감독의 영화를 대폭 선택한 것은 또 하나의 코드 선택인가?

이경기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