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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감성 공화국, 코리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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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화가 마르크 샤갈(1985년 사망).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는 샤갈이 한국인의 감성을 달구고 있다. 7월부터 석달간 서울에서 열렸던 샤갈 작품 전시회엔 국내 전시 사상 최고 기록인 50만명이 몰렸다(지금은 부산 전시 중, 한국일보 주최).

주부들 사이에선 "'샤갈전을 보러가자'는 제안을 받지 못하면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농담이 나돌 정도다.

왜 이런 열기가 생겼을까. 러시아 태생인 샤갈은 대담한 파란색을 기조로 해 빨강.노랑.초록 등 현란한 원색과 형상으로 된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그림을 남겼다. 소재도 푸근하다. 가족이나 연인이 하늘을 나는 가운데 꽃.동물.고향마을 등이 배경을 이룬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강렬한 색채와 따뜻한 구도가 한국 관람객들의 감성을 폭발시킨 것이다.

배용준(일본식 애칭 욘사마)의 '겨울 연가'로 대표되는 한류 열풍도 한국인의 감성 경쟁력이 에너지원이다. '욘플루엔자'(욘사마+인플루엔자)라고 불리는 일본 중년 주부들의 배용준에 대한 매료는 우리도 모르고 있던 감성 경쟁력이 우리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일본 여성들의 배용준 몰입은 부드럽고 섬세한 데다 애정 표현을 듬뿍 쏟아내는 로맨틱한 남성상이라는 데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일본 남성보다 강인해 보이는 한국 신세대 남성에게 끌린다는 것이다. '나도 저런 사랑을 받고 싶다'는 열병이다.

우리 생각과 달리 일본은 한국 이상으로 가부장제가 강하다. 그리고 속정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전통도 있어 퇴근한 남편들은 대개 무표정하다. 일본인들의 표현은 한국인처럼 직설적이지 않고 우회적이다. 특히 중년 일본 주부들은 고도성장기에 직장 일에만 묻혀 산 남편과 무미건조한 가정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이 점은 한국 중년남성도 마찬가지!)

그 스트레스가 배용준과 겨울 연가가 듬뿍듬뿍 쏟아내는 '감성'을 만나자 열광으로 나타난 것이다.

얼마 전 한국 배우들을 지휘해 국립극장에서 '귀족 놀이'를 공연한 프랑스 연출가 에릭 비네는 "한국 배우들의 풍부한 감성 표현에 놀랐다"는 말을 남겼다.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호소력은 통찰력 있는 감독과 PD들이 연출해내는 감성적인 배경 화면과 표현들에도 바탕을 두고 있다.

한국의 인터넷은 '감성의 바다'다. 한 장의 감동적인 사진이나 글이 등장하면 대 히트를 한다. 다른 사람의 글이나 사진에 줄줄이 남기는 댓글들도 감성의 교류장이다. 싸이월드의 개인 미니 홈페이지에서는 예쁜 벽지나 가구를 사서 치장하는 감성 경쟁도 벌어진다.

올 들어서는 우리 기업들의 광고도 감성 자극형으로 확 바뀌었다. 제품 홍보보다는 분위기 있게 감동을 주는 데 치중한다. 디자인도 감성 디자인이 대세가 됐다. 국내의 외국기업들도 한국에서 감성이 갖는 중요성을 깨닫고 문화행사나 사회공헌 등 감성 마케팅에 나섰다.

TV의 불우이웃돕기 생방송에 전화로 2000원씩 내는 돈이 금세 1억~2억원이 되는 놀라운 현상도 눈물과 정에 약한 민족성 덕분이다.

한국이 '감성 공화국'이 된 데는 세계에서 찾기 힘든 금수강산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눈물로 얼룩져온 역사, 술과 노래.춤에 온몸을 던지는 천성 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도 감성의 확산 통로다.

감성으로 세상일이 좌우돼서야 되겠느냐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러나 21세기형인 감성산업에서 한국이 강자로 떠오르고 있음이 든든하다. 연예.예술.디자인.패션.공예.인테리어.문학.사진 등 감성산업에 승부의 화살을 쏘아보자. 잠시 우리의 피리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 온몸에 감성의 전율이 오지 않는가.

김일 디지털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