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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의 길을 따라서 - 순례기에서 못 다한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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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신약성경은 모두 27권이다. 그 중 최초로 기록된 건 뭘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같은 4복음서일까. 아니다. 신약성경 중 최초로 기록된 문서는 사도 바울(바오로)의 데살로니가서(데살로니카서)다. 4복음서는 그 후에 기록됐다. 27권의 신약성경 중 13권이 바울의 서신이다.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이것만 봐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바울이 차지하는 위상이 한눈에 드러난다. 그런데 13권 중 7권만 바울이 직접 쓴 것이라고 한다. 데살로니가 전서, 고린도 전·후서, 갈라디아서, 로마서, 빌립보서, 빌레몬서 등이다. 나머지는 바울의 제자나 후학들이 쓴 뒤 스승을 이름을 달았다는 게 신학계의 통설이다. 그렇다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바울의 위상이 깎이는 건 아니다. 바울은 생명의 그리스도를 체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서간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을 통해서 길어 올린 생명의 울림이 곳곳에 녹아 있다. 3회에 걸쳐 연재했던 ‘사도 바울의 길을 따라서’에 담지 못한 이야기를 한 편 더 싣는다.

터키 안디옥에 있는 베드로 동굴 교회를 순례객들이 둘러 보고 있다. 2000년 전 이곳에서 바울은 베드로와 만나 화해를 했다고 한다. 박해 시절, 로마 병사들이 들이닥치면 그리스도인들은 비밀 통로를 통해 달아났다고 한다. 동굴 구석에 지금도 그 통로가 남아 있다. 동굴 위쪽에는 베드로의 석상이 보인다.

◆안디옥의 2000년 전 동굴교회=지난달 2일 터키의 안디옥으로 갔다. 그곳에는 2000년 전에 세웠다는 교회가 하나 있었다. 벽돌도 없고, 창문도 없었다. 그건 암벽으로 뒤덮인 산에 뚫린 동굴이었다. 교회의 이름은 ‘베드로 동굴 교회’. 높다란 바위산에는 여기저기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그 많은 동굴 중 하나가 교회였다. 동굴로 들어섰다. 내부는 널찍하고 천장도 높았다. 동굴 벽에는 아주 옛날에 칠했던 성화의 흔적들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2000년 전, 이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메시지를 들었다. 행여 로마 병사에게 들킬까 봐 숨어서 말이다. 베드로는 여기쯤 앉았을까, 아니면 저기쯤 앉았을까. 동굴 귀퉁이의 암벽에선 지금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아래에는 물이 고여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그 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동굴 구석에는 어른 한 명이 허리를 숙이면 들어갈 수 있는 비밀통로도 있었다. 그 통로는 바위산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숱한 굴들과 연결돼 있었다. 로마 병사들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사람들은 그 굴로 도망쳤다. 내부는 아주 캄캄했다. 미로처럼 얽혀 있어 입구를 잃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당시 로마 병사들도 두려워서 섣불리 굴에 들어가진 못했다고 한다.

순례객들은 거기서 묵상을 했다. 현지인 가이드는 “이 동굴에서 바울과 베드로가 만나서 화해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설명했다. 바울과 베드로가 화해했다니, 그럼 둘이 싸웠단 얘기다. 그들은 무슨 일로 싸웠을까. 그들의 의견 대립은 무엇이었을까. 거기에 예루살렘의 종교가 세계의 종교로 성장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

로마의 성바오로 성당 앞에 있는 바울의 석상. 바울은 그토록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로마에서 참수형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중앙포토]

◆바울이 겨누었던 구원의 징표, 할례=예수는 유대인이었다. 그는 유대의 땅에서 살다가, 유대의 땅에서 죽었다. 예수는 유대의 상식, 유대의 세계관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유대의 언어, 유대의 문법으로 진리를 설했다. 그의 제자들도 유대인이었다. 그래서 2000년 전에는 유대교의 연장선상에서 예수를 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예수의 열두 제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예수가 진정 누구인지 몰랐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그의 가르침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 사후에도 제자들 상당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올리며 여전히 유대의 율법을 따랐다고 한다.

바울은 거기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바울이 겨누었던 타깃은 ‘할례(유대인이 태어난 지 8일 만에 받는 포경수술)’였다. 유대인에게 할례는 목숨과 같은 율법이다. 구약성경에는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창세기 17장10절)고 기록돼 있다. 그들에게 할례는 구원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구원은 오직 할례를 받은 이들, 즉 유대인만의 몫이었다.

바울은 그걸 깨자고 했다. 할례를 받지 않은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에게도 예수의 메시지를 전하자고 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이방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말이다. 대부분의 사도에겐 충격이었을 터이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방인에게 전할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사도 그룹에서 유연한 편이었던 베드로도 이방인과 식사를 했다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베드로 동굴의 구석에 가서 앉았다. 눈을 감았다. 바울의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왔을까. 예수를 직접 본 적도, 예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은 적도 없던 그가 어떻게 사도 그룹을 설득했을까. 그가 아는 예수는 과연 어떤 예수였을까.

◆열정의 바울인가, 생명의 바울인가=바울은 다마스커스(다마섹)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했다. 그리고 3년간 역사에서 사라졌다. 신학자들은 그가 광야로 갔으리라 추정한다. 광야가 어떤 곳인가. 광야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만 하는 고난의 땅, 고난의 시간이다. 가나안 땅을 찾아가던 모세도 그랬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고, 기도하며, 악마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게 광야였다. 그러니 바울이 광야로 간 것은 그리스도 안으로 녹아 들기 위함이었다. 바울 역시 예수가 물리쳤던 악마를 광야에서 만났을까. 그리고 유혹과 싸웠을까. “돌로 떡을 만들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라. 그럼 천사들이 너를 받아줄 것이다. 나(악마)에게 경배하면 세상을 주겠다.” 바울은 우리 안에 잠자는 그 모든 유혹과 싸우지 않았을까. 그런 유혹의 고삐를 움켜쥘 때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까. 그러니 바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에는 힘이 넘쳤다. 그건 바울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힘이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등 12사도는 오랫동안 예수를 따라다녔다. 그들은 예수의 머리칼, 예수의 피부색, 예수의 억양, 예수의 눈동자를 기억했을 터이다. 12사도는 그렇게 ‘육신의 예수’를 봤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 왜일까.

동굴교회 출구로 나왔다. 낭떠러지 아래로 안디옥 시내가 펼쳐졌다. 그 위로 새가 날았다. 눈을 감았다. 예수가 누구인가. 말씀이 육신이 된 이가 예수다. 그러니 ‘말씀’을 모른다면 예수를 알 수가 없다. 바울은 ‘육신의 예수’를 본 적이 없었다. 대신 그는 말씀의 예수, 생명의 예수를 체험했던 것이다. 그러니 누가 진정 예수를 아는 사람인가.

바울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예수의 생명, 예수의 복음을 전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의 사도’로 불린다. 베드로 동굴교회에서 나왔다. 햇볕에 눈이 부셨다. 계단에는 외국인 순례객들이 계속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방인이었다. 바울은 이미 봤을 터이다. 예수의 생명, 예수의 사랑이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이미 세상에 꽉 차 있음을 말이다. 그러니 예수는 유대의 예수도, 이방인의 예수도 아니었다. 모두의 예수였다. 바울은 그걸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요즘도 많은 이가 사도 바울을 기억한다. 목숨을 건 그의 전도 여정을 기억한다. 그리고 바울을 따라서 외친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목이 또 하나 있다. 바울이 먼저 복음을 전한 곳은 세상의 땅끝이 아니었다. 내 안의 땅끝이었다. 나의 내면에서 버티고 있는 ‘광야의 악마’, 그 숱한 이방인의 땅을 향해 바울은 먼저 복음을 전했다. 그건 스스로 십자가에 올라가 예수의 몸에 자신을 포개는 일이다. 나의 혈관, 나의 욕망, 나의 근육, 나의 가짐을 허물고 내 안의 땅끝까지 복음이 흐르게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을 제대로 기억해야 한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은 열정의 바울, 투지의 바울, 불굴의 바울이다. 그러나 그 아래 흐르는 물줄기를 봐야 한다. 그건 생명의 바울이다. 예수는 말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의 생명, 바울의 생명, 오직 그 생명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안디옥(터키)=글·사진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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