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1. 샛강<4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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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우리는 일꾼들 눈에 띄지 않게 목재소로 들어가 쌓아 놓은 재목더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쌍성루 이층 바깥쪽으로 튀어나온 쇠사다리를 타고 옥상에 이르렀는데, 우리는 곧 실망해버리고 말았다.

- 요논들 먼때메 온나오니?

혀 짧은 소리로 고문관 아저씨가 말했다. 그는 벌써부터 구경하기 좋은 장소를 딱 점령하고 먼저 와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방앗간 지붕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고싶다고 말했고 그는 의외로 너그럽게 허락했다.

-짜식든 또 고문관이다구 논녀바다. 온나와서 구경해다.

국원이와 나는 생쥐처럼 또르르 달려가 그의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정미소의 지붕이 손바닥처럼 내려다보였다. 정미소 지붕 위로는 굵은 고압전선이 늘어져 있는데 아이가 전선에 휘감긴 채 쓰러져 있고 등에서는 옷이 타는지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낙수받이에 걸린 고무공도 보였다. 지붕 위에서는 정미소 사람 몇이 올라가서 긴 장대로 전선을 걷어내려고 휘젓고 있었는데 갈라진 전선들이 마찰될 때마다 뿌지직거리며 푸른 불빛이 번쩍였다. 어느 노인 하나가 사람들이 말리는데도 지붕으로 올라왔다. 두 손에는 찢어진 자동차 튜브를 감고 있었다. 노인이 튜브 감은 손으로 전선을 잡아챘지만 여전히 아이에게 휘감긴 부분은 떨어지질 않았다. 아이는 전선이 좌우로 뒤틀릴 때마다 꿈틀꿈틀했다. 노인은 다시 아이를 떼어내려고 몸에 닿은 전선을 잡아채는데 왼손 위에 늘어졌던 전깃줄이 정말 살아 있는 뱀처럼 노인의 팔뚝에 철썩 엉겼다. 노인이 비틀거리며 왼쪽으로 쏠리다가 넘어졌고 이어서 다리에 전선이 또 한번 휘감겼다. 노인은 전선에 붙어버린 다리를 빼내려고 부들부들 떨면서 버둥대다가 간신히 한쪽 다리를 떼어냈는데 피부가 벗겨져 나갔는지 피가 흘러내렸다. 노인은 놓여난 한 손으로 슬레이트 지붕을 때리면서 소리쳤다. 사람들은 모두둘 숨만 죽이고 구경을 하는데 누군가가 '변전소에 연락을 한 거냐, 두 사람 다 내버려두면 죽는다'고 외쳤다. 순경은 초조하게 시계만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그때 벌떡 일어선 고문관 아저씨를 어리둥절하여 올려다보았다.

- 나쁜 놈든 가트니… 구경만 함 다야? 선인하사가 전투에 나가는데 경네 안하냐?

국원이와 나는 어쩐지 그가 농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나란히 차렷 자세로 경례를 척 올려 붙였다.

잠시 후에 구경꾼들의 술렁대는 소리와 함께 고문관이 지붕 위로 나타났다. 그는 전혀 맨손이었다. 먼저 노인에게 달려들어 휘감긴 전선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의 온몸은 거세게 떨렸고 전압을 견디느라고 경직된 근육들이 부풀었으며 고통을 참는 그의 눈알이 생선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전선이 붙었다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깊은 상처가 나면서 피가 흘러 고문관의 몸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었다. 드디어 그가 노인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른 사람들이 상체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지붕 위로 기어가 노인을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림=민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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