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두더지 잡기'는 그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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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김대중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과 최근의 부동산 투기 대책을 보면 원인은 제쳐놓고 결과만 잡으려는 접근법이 눈에 띈다.

金대통령은 '몇몇 벤처기업의 비리'에 대한 '죄송한 심정'을 표명하면서 곧이어 "첨단산업을 육성하고 2005년까지 5백개의 일류상품을 개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날 밤 늦게까지 원고를 직접 쓰다시피 다시 손질했고 회견 당일 아침에 최종 원고를 비서진에 내려보냈다는 金대통령은 아직도 벤처 비리가 근본적으로 '정부 지원'에서 비롯됐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듯하다.

과거 정권들이 적극 지원했던 수출.중화학투자.해외건설이 다 어떻게 되었는가. 숱한 로비.암투와 부정이 있었고 결국엔 자원 배분을 심각하게 왜곡해 큰 대가를 치르며 부실기업들을 정리해야 했다. 벤처도, 첨단산업도, 일류상품도 마찬가지다. 모든 지원은 선별적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기업들은 기술개발보다 로비에 힘을 쏟고 결국 부정부패로 이어진다. 쉬운 길을 왜 어렵게 돌아가겠는가.

金대통령은 1960,70년대 발상 대신 "정부의 직접 지원책들을 모두 거두겠다"고 했어야 옳았다. 부동산 투기 대책도 마찬가지다.

불황에서 벗어나려고 건설경기를 부추겼고 초저금리 속에 돈을 풀어놓았는데 돈이 부동산으로 안가면 이상하다.

아직 경기가 불투명한 판에 투기가 일면 큰일이니 어떻게든 투기를 미리 잡아야만 하는 정부의 고충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재산세는 올리고 양도세는 내린다는 세제의 기본은 어디 갔는가. 아직도 평형에 따라 매겨지고 있어 같은 평수라면 5억원짜리든 1억원짜리든 거의 똑같은 세금이 매겨지는 재산세는 언제 손질할 것인가. 양도세 부과는 국세청이 당연히 해야 할 일상 업무 아닌가.

미국 실리콘 밸리의 벤처 기업들은 정부 지원으로 큰 게 아니라 두뇌.기술.자본이 어우러진 토양 위에서 자생(自生)했다. 그러다 실리콘 밸리의 땅값.집값이 엄청 뛰어오르자 국세청을 불러들이지 않고 다들 알아서 시애틀 등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값을 억눌러놓으면 전입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요, 첨단산업.일류상품을 육성한다면 로비 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다.

김수길 경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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