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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고 이형근 초대 합참의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분단의 비극을 겪고 있는 이 땅에 참 군인의 길을 밝혀준 창군 원로이셨습니다."

13일 밤 82세를 일기로 타계한 이형근(李亨根.예비역 대장)장군에 대한 백선엽(白善燁)예비역 대장의 회고다.

고인은 한평생을 '진정한 군인의 자세'를 지키려고 한 군의 사표(師表)로 추앙받고 있다.

1920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李장군은 일본 육사를 졸업한 뒤 해방을 맞자 46년 국방경비대 대위로 임관했다.

대한민국 군번 1번(10001)이자 창군의 주역으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2사단.8사단장을 맡아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부산에 피란 중이던 부인이 50년 9월 산고를 겪다가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나고, 수도사단 참모장으로 참전했던 동생(이상근 예비역 준장)마저 청송전투에서 전사하는 비극을 맞기도 했다.

한국전 기간 중 李장군은 당시 미국 일각에서 원자폭탄 사용론을 제기하자 "민족이 공멸한다"는 논리로 반대의사를 강력히 개진했다.

전쟁이 끝나자 李장군은 54년 초대 합참의장을 거쳐 56년 9대 육군참모총장에 부임했다. 그때 그는 고질적인 군인사 및 군납비리를 척결하려다 중상모략에 시달렸다. 그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총장직을 그만두라는 압력을 받아 58년 예편했다.

그 후 李장군은 6.25 전쟁에 대한 공로로 군인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상했으며, 주영대사와 주필리핀 대사를 역임했다. 참 군인으로서의 李장군의 모습은 예편 후에 더욱 빛이 난다.

지난 58년 전역 직후 당시 장면(張勉) 정권이 입각을 권유했으나 거절한 것이다.

李장군은 후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거절 사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 당시는 내각책임제라 장관이 되려면 당적을 가져야 했는데 나는 '군인이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신조로 당적 갖기를 거부했다. 난 아직도 군인은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군인이 정치에 간여해서는 안된다는 李장군의 철학은 타계할 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둘째아들 이헌(李憲.52.기산통신대표)씨는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역대 정권이 부친에게 입각을 권유했지만, 전역을 했더라도 군인은 군인으로서의 길을 가야 한다며 끝내 거부했다"고 말했다.

고인은 80년대 신군부의 요청으로 국가보위입법회의에 참여해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안돼 갈등을 느껴 입법위원직을 사직했다.

李장군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이 국영기업체 사장 자리를 권유했지만 고인은 "나라 지키는 것밖에 아는 것이 없다"며 거절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膾炙)되고 있다.

특히 李장군은 군이 제대로 서려면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해 군사정권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받기도 했다.

"나는 투표 때 전두환.노태우 둘 다 찍지 않았다. 오늘날 군이 이렇게 된 것은 군이 두번의 쿠데타로 정치에 개입했기 때문으로 군인이 자기영달에 급급하면 파렴치해진다"는 말을 공.사석에서 서슴지 않고 했다고 아들 李씨는 기억했다.

"군인은 죽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있는 한 군인은 같이 있을 것입니다."

李장군이 '군번 1번 외길 인생'이란 제목의 회고록에 남긴 글이다.

합동참모본부는 이처럼 평생을 군인의 자세로 살아온 李장군의 업적을 기려 최초로 '합동참모본부장'으로 영결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빈소는 국군수도병원(031-725-6134)에 마련됐고 영결식은 17일 오전 10시 국립현충원에서 거행된다.

이철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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