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3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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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검사의 길

20. 놓쳐버린 '황태자' 자리

1980년 11월 5일 법무부 검찰2과장에서 영등포지청 부장검사로 발령받았다. 법무부 검찰1과에서 2년여를 근무하고 대검찰청 연구관으로 1년여, 그리고 검찰2과장으로 6개월 정도 근무한 뒤 처음으로 일선 검찰의 부장으로 나가게 되었다.

처음 일선 부장으로 나가는 것이라 마음이 설렐 법한데도 그리 유쾌한 기분이 아니었다.

이유는 이랬다. 당시 검찰1과장 자리가 비어 누군가를 발령을 내야 할 상황이었다. 법무부 내부에서는 검찰1과 근무 경력도 있고 당시 검찰2과장이던 나를 당연한 차기 검찰1과장으로 생각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정식 인사 발령도 나기 전에 나의 고등고시 1년 후배인 朴모 검사가 1과장으로 내정돼 업무 인수인계를 받고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검찰1과장 자리는 '검찰의 황태자'로 불리는 핵심 요직이다.

당시 장관은 내가 검찰연구관으로 있을 때 총장으로 모셨던 분이었다. 하루에도 몇번씩 결재를 받았고 전국에 내려보내는 지시 공문을 기안했던 관계 등으로 인해 나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고 또 나의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분이었다.

나중에 나를 아끼는 어느 선배로부터 들은 얘기지만 그 장관은 朴검사가 고등학교 후배여서 할 수 없이 1과장으로 임명했다고 솔직히 실토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나는 개청 초기에 근무했던 남부지청의 부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남부지청에는 부(部)가 세 개 있었다. 나의 동기생인 박혜건 부장도 거기 있었다. 우리 부 검사로는 김규한(金奎漢.전 인천검사장.변호사).김원치(金源治.대검 형사부장).이종백(李鍾伯.대전고검 차장).김동섭(金東燮.변호사).김승년(金勝年.변호사).이훈규(李勳圭.수원지검 2차장)검사 등이 있었다.

나는 울적했던 기분을 바꿔 이들과 같이 열심히 일하면서 재미있게 지냈다.

당시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된 소년범에 대한 선도조건부 기소유예 제도의 발전적 운영을 위해 담당검사인 이종백 검사는 전국 검찰청 가운데 가장 먼저 선도위원들을 전경련회관으로 초청해 전문적 교육을 받게 하는 등 검사들은 맡은 업무에 전력을 다했다.

부원들과 함께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청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신진자동차 학원에 등록했다. 매일 아침 티타임에는 자동차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김승년 검사의 지도로 필기시험 공부를 하고 점심시간에는 자동차학원에 함께 가 실기를 배웠다. 이미 운전면허증을 가지고 있던 이종백 검사를 제외한 부원 전원이 서울 한남동 자동차운전면허시험장에 가 시험을 봤다.

수백명의 응시자들이 보는 가운데 내가 가장 먼저 실기시험에 통과했다. 그것도 시험이라고 흥분되고 긴장됐다. 내가 실기시험에서 합격하니 그곳에 있던 수백명의 응시 대기자들이 박수를 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른 검사들도 합격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결과가 일어났다. 우리들의 필기시험 조교였던 김승년 검사가 코스 시험에서 시간 초과로 떨어지고 말았다.

金검사의 제자들인 우리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金검사의 낭패한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S코스에서 후진하면서 제한 시간을 지키지 못해 탈락한 것이었다. 시험관에게 한번 더 시험을 치를 기회를 달라고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할 수 없이 운전면허 시험관들에게 사정해 다음 실기시험 일자에 다시 나와 치러야 하는 실기시험을 그 자리에서 미리 보는 방식으로 양해를 구했다. 金검사는 그제서야 합격했다.

우리는 운전면허증이 나온 다음 운전면허 취득 기념 파티를 열려고 했으나 金검사의 운전면허증 순번이 우리보다 5백여명이나 뒤로 처진 관계로 그것이 발부되기를 기다렸다가 축하파티를 가졌다.

술자리 테이블에 먼저 합격한 검사들의 운전면허증을 나란히 정렬하고 그 아래에 金검사의 면허증을 놓고 한바탕 웃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만 나오면 金검사는 겸연쩍어 어찌할 줄 모른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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